푸생, 성찬(내셔널 갤러리,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유난히 많이 소장한 것처럼 보이는 작가 중에는 푸생이 있다. 나는 관심도 없는데 소장품 목록을 보면 작은 방 하나는 거뜬히 채울 정도의 양이었다. 푸생 그림은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그림이 뻔하고 평범하게 양식화되어 있다고. 고전주의란 모름지기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뻔하고 당연하고 평범해 보이는 것.
그러나 그런 그림을 유명 미술관이 많이 갖고 있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렇지 않아도 시도해 볼만한 일이다. 내가 발견 못한 재미나 즐거움이 있지 않은지 재검토할 기회다. 그러다 내셔널 갤러리 유튜브 채널에서 푸생과 그의 작품에 대한 큐레이터들의 대화가 담긴 영상을 봤는데 그게, 꽤 흥미로웠다.
먼저, 이 프랑스인은 당시 많은 화가들이 그랬듯이 미술의 중심지,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어 했고 그 꿈을 이루었다. 로마에 거주하게 된 이 화가는 단 한번 프랑스에 잠시 돌아갔다 온 다음에는 죽을 때까지 로마에 살았다고 한다. 음, 이 사람 나와 공통점이 있군. 우리는 로마를 좋아하잖아. 공통점은 쉽고 과도하게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다음으로 이 사람 그림의 특성에 대한 언급이 흥미롭다. 춤추는 장면을 많이 그렸는데, 그 동적인 순간이 완전히 정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푸생 자신이 일종의 모형들을 만들어 자기가 그릴 장면의 움직임을 연구하지 않았나 짐작하고 있었다. 또 그런 전제에 따라 미술관 사람들은 직접 모형을 제작해보기도 했다. 일종의 역공학이었다. 그림으로부터 모형을 도출하는. 관람객에 입장료를 받지 않으면서 이런 연구를 하는 돈이 대체 어디서 나는 건지, 나는 쓸데없이 미술관 경제 사정 같은 것을 약간 염려했다. 그러면서 프레데릭 와이즈먼 감독이 이 미술관에 대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다시 봐야겠다고 비장하지는 않은 다짐을 했다.
마지막으로, 성찬(1637-40년 작, 위 그림)을 봤다. 지금까지 본 그림들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어둡고 눅눅한 고동색 배경이 화면의 반을 차지하는 그림 속에서 예수와 열두 제자가 식사를 했다. 배경색과 그 중간에 촛불 하나로 밝힌 지점이 훌륭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의 다른 그림, 내게는 뻔하고 평범한 작품들과 달리 성찬은 침묵과 차분함, 신비로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 신비로움. 관람객과 관객, 독자를 꾀는 데 신비로움은 얼마나 중요하고 효과적인지! 신비로움의 일부는 알 수 없음, 끝끝내 답할 수 없음, 답을 확정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나에게 이것은 좀 혼란스러운 미덕이었다. 나는 이삼십 대를 분석을 섬기는 교도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설명할 수 있는 데 있었다. 가능한 명쾌하게, 어렵고 복잡한 것을 쉽고 명백하게 설명하는 것이 진리이며 아름다움인 세계였다. 모든 것을 찢어서 선후관계와 인과관계를 가능한 명백히 밝혀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 비약, 설명할 수 없음이 최대한 없는 상태를 추구하고 그 경지에 도달하기를 기도했다. 설명할 수 없는 것, 모호한 것을 적대시했다. 완전히 파헤쳐지지 않은 것은 불완전했고 무의미했다.
그러나 나를 조르조네의 '폭풍우(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앞으로 반복해 이끈 것은 돌아보면 신비로움이었다. 사람들을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내셔널 갤러리, 런던)' 앞으로 끝없이 이끄는 것 역시 그렇다. 어찌 보면 신비로움이야말로 분석가들을 흥분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무한한 설명을 위한 자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비로움 앞에서 끝없이 생각할 수 있다. 이야기와 가설은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탐구자들은 신비로움 앞에 도전자처럼 서서 감상할 수 있다. 나는 때로 탐구자처럼 그림 앞에 선다.
푸생의 다른 그림들이 분석 결과처럼 명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그것이 진부한 해석 같았고 그래서 지루해했을 수도 있다. 반면 성찬은 어딘지 다른 비밀이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을 느끼도록 한다. 어둠은 신비와 가까울 수밖에 없다. 자세히 보기를, 집중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셔널 갤러리를 다녀온 후 푸생이 지루하다는 기존 가설을 수정했다. 그의 그림은 구조적이고 치밀한 구성에 기반한다. 그의 그림에는 자주 생각 이상으로 많은 인물들이 얽혀 있다. 그 얽히고설킴은 분주하고 복잡하지 않게 구현되었다. 그 구성 위에 입힌 색은 초벌처럼 너무 얇아 보이지만, 조금 특별한 점은 있다. 그의 그림 전반에 감도는 해 질 녘 빛 같은 색감이다. 금송아지 숭배(1634년 작, 내셔널 갤러리, 런던), 판이 등장하는 여러 신화 소재 그림들에는 이런 테라코타 같은 색감이 지배적이다. 이 색이 나는 썩 싫지 않았다.
내셔널 갤러리가 로마에서 주로 활동한 프랑스 화가 작품을 이렇게 많이 소장한 경위는 앞으로 종종 생각해 보고 어쩌면 조사해 볼 흥미로운 질문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