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그림들을 향한 기이한 열망

by 만정

6월 중순 3박 5일 런던 여행을 예약했다. 3개월만에 다시 런던에 간다. 목표는 오직 내셔널 갤러리 방문. 나는 다시 14시간 비행 끝에 녹초가 되어 루스의 아파트에 도착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오후 7시 전일 수도 있다. 이번엔 저녁 먹을 기운이 남아있을지 모를 일이다. 저녁을 못 먹으면 일요일 아침에는 8시에나 문을 여는 세인트 조지 커피 숍 앤 와인 바에서 식사를 할 때까지 별 수 없이 굶주릴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관대한 루스가 게스트들에게 허용하는 음식들, 그러니까 주방에 있는 모든 것 중 무언가를 먹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배가 고파 오픈 전부터 문가를 서성이다 들어가서 조금 쓴 진한 라떼에 빵을 잔뜩 시킬 것이다. 정신이 들면 영수증에 찍힌 금액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될텐데 이번에도 여전히 나는 놀라게 될까? 아무리 천천히 아침을 먹어도 미술관이 문을 여는 열시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았을 것이다. 날씨가 나쁘지 않으면 코벤트 가든까지 산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트라팔가 광장을 어슬렁거리며 지루해하다가 입장이 시작되자마자 미술관에 들어서리라.

지난 번에는 공사 중이던 세인트버리 입구로 들어가 나는 마침내 만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보다는 티치아노를 염두에 둔다. 바쿠스와 아드리아네. 그 파란 바탕의 제법 클 그림을.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글라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에 승천하는 성모가 입은 붉은 옷만큼 그 파란색은 나를 사로잡을까? 아무래도 루브르의 자매보다는 대접 받고 있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도 이번에는 볼 것이다. 루브르 버전에서 당시 신학적으로 논란이 된 부분들을 제거해냈다는 이 자매님은 좀 더 고요한 시공간을 내게 허용해줄까? 그 속에서 마침내 나는 다빈치와 화해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을까? 그러는 동안 벌써 마음이 급해진다. 나는 조급함에 발걸음을 옮기고 말 것이다. 그렇게 벨리니와 만테냐의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뇌가 같은 방에 걸린 모습을 볼테다. 메시나의 서재에 있는 성 제롬과 피사넬로의 산에우스타키오의 환시를 볼 생각을 하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좁은 방에 민망하게 얼굴을 맞대고 있던 북유럽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들이 임시 거처를 떠나 조금이라도 널찍한 공간에 자리잡았을 생각을 하면 괜히 내가 설렌다. 이번에야말로 얀 반 에이크의 그림들을 자세히 오래 볼 각오가 되어있다. 한스 멤링과 얀 고사르도 잊지 말지어다. 티치아노가 조르조네와 닮은 듯도 보이는 나를 만지지 말라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미술관의 조르조네들을 내가 미처 다 알아보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난다.

아직 르네상스 일부를 훑었을 뿐이다. 지난 번에 너댓번 보고 몇십 분 쯤 마주 했다고 해서 카라바조의 엠마오의 저녁식사를 건너뛸 수는 없는 일이다. 카날레토의 석공의 작업장을 내 기억과 대조해 볼 것이다. 렘브란트가 여전히 뽐내고 있는지 볼 것이고 거대한 인상파 컬렉션까지 일별해야 내 허기가 간신히 좀 달래질 것이다.


미친 짓 같지만. 이라고 필요 없는 수식을 붙여 이 여행을 변명하려는 스스로를 바라본다. 멋쩍은거니? 멋쩍다면 무엇이? 아마도 이 열망일 것이다. 올초 이 미술관 방문을 결심하기 전부터 이미 스스로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강력한 열망 혹은 욕망이다. 나는 어째서 이 늙은 그림들을 보지 못해 안달인가? 입술을 달짝여가며 왕복 28시간 비행을 감내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밝히는 데에는 아마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를 깨달을 때까지, 그러니까 남들에게 설명하기도 어려울-런던에서 3박만 하고 왔다고? 아니 여행이 아니고 같은 미술관을 사흘동안 열시부터 다섯시까지 방문하는 일정이었다고? 그게 출장이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만든 계획이었다고?- 이 열망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괴한 3박 5일 같은 여행을 몇 번이나 더 해야 할 것이다. 그 몇 번이나를 다 할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할 만큼 하면 그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 한 것 같아.

그래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 없다. 한결 가벼울 여름 배낭을 다시 꺼내 짐을 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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