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체와는 처음으로
다시 런던, 루스의 아파트. 해가 잘 드는 한쪽 방 침대에 누워있는 6월 중순의 오전 5시.
이번 비행은 걱정과 달리 순조로웠다. 터뷸런스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지난 3월 14시간 비행 동안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불면의 당혹에 관한 것이다. 나는 불안과 좌절, 분노를 떨치기 위해 지난 몇 년 간 내 상담사와 공들여 훈련한 방식을 응용한다. 아, 나는 아침 비행기에서 잠잘 수 없구나. 사람이 그럴 수도 있죠. 일단 인정해 주세요. 내가 만든 문장에 그녀의 목소리를 입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수면을 포기하자 불면의 고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순순히 통제되어 주었다. 수면 대신 독서를 시도했고 이번에는 이 방법이 통했다. 고통스러운 비행을 잊게 해 준 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그녀를 지키다’에 감사를 표한다.
한국은 장마철에 접어든 이 시기, 내가 머물 나흘 동안 런던은 맑을 예정이다. 해가 일찍 뜨고(오늘 보니 오전 4시면 벌써 밝아지기 시작한다) 늦게까지 지지 않는(어제 오후 9시까지도 밝았다) 계절적 축복은 3박 5일 여행에서 조금 낭비일지도 모르겠다. 비행의 피로를 막았다고 시차적응까지 뜻대로 되지는 않아 저녁 7시에는 자리에 누워야 하니까.
내가 여행에 대한 편견이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하며 놀라는 직장 상사의 반응이 이상하게 느껴질 것도 없다. 순조로운 비행 동안, 사실은 집에서 출발해서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잠자지 않은 22시간 동안 비슷한 질문을 쉼 없이 한 건 바로 나 자신이므로. 그래도 내 상사의 질문을 통해 보다 명확해진 건 이 여정이 여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행보다는 출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 출장. 삼일 동안 미술관에서 하루 7시간을 보내는. 언제 그 보고서가 결과물로 제출될지는 지금 약속하기 힘든. 그러므로 회사에서라면 도저히 출장 품의에 승인을 받지 못했을.
EPL 세 게임을 삼일동안 보려고 런던에 간다는 사람도 비슷하게 괴짜, 사실은 약간 미친 사람 같다는 주변 반응을 들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실상 이 일에 가장 당혹한 사람은 여전히 나 자신이다. 그런 욕망, 있을 수도 있죠. 라는 문장을 재빨리 만들어본다. 그러나 내 상담사의 목소리를 아무리 가장해도 진정되지 않는 당혹감. 이 당혹감의 실체를 여전히 나는 완전히 파지하지 못한다.
당혹감, 아니 그보다는 의혹이(과연 이 왕복 28시간이 합당한 21시간일까?) 미술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3월에 여전히 공사 중이어서 나를 실망시켰던 세인즈버리 윙, 그 완전한 새집에는 중세라고 이름 붙인 지도상 구분이 무색하게 동선의 첫 번째 해당하는 방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두었다(라파엘과 미켈란젤로도). 르네상스는 건너편 건물에 명백한 구분을 이름 붙여 배치했지만 이들 하이르네상스 세 사람은 (대체로) 여기 위치한다. 그 시작점에, 예고도 없이, 한 벽면에 오직 ‘암굴의 성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단도직입적인 배치에 완전히 한방 먹었다. 나는 놀라버린 것이다. 내 시선에서는 너무 높지만 상관없을 정도로 훌륭한 자연채광과 조명 조합 아래서 그림은 한껏 선명한 모습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고요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몰려도 해칠 수 없을 고요함이 그림 자신만의 힘이 아님을 루브르에서 깨닫고도 나는 그림에 신비의 포장을 아낌없이 둘렀다. 흔쾌히 그랬다. 그러고 보니 막상 비교하고 대조하려 벼르고 있던 루브르의 자매님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망연자실해서 사진도 남기지 못했던 그림. 그를 다시 보러 루브르에 가야 할 이유와 용기는 이렇게 쉽고 허망하게 부활하고 만다. 그럴 가치가 있건 아니건 간에, 그것이 영원할지 아닐지와 상관없이, 바로 이점이 나를 괴롭히는 줄 알면서도, 나는 이 오래된 그림들을 지금 내가 지극히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한다. 한동안은 나를 사로잡고 있을 이 추구, 열망, 욕망, 어쩌면 강박적인 집착을 비로소 인정한다. 아직 완전히는 아닐지 몰라도, 저항을 내려놓고 한발 물러선다. 내가 원하는 대로만 욕망할 수는 없다는 것. 그냥 그런 것이다.
뒷방의 벌링턴 카툰은 그것대로 마음을 끄는 힘이 있다. 성 모자와 안나, 여기에 세례자 요한까지 조합한 이 도상, 그 미완의 스케치에서 다빈치가 추구했던 어떤 것들, 그림 밖으로 풍기는 감정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세계의 이치를 일찍이 깨달은 천재가 추구했을 법 한 그 부드러운 경계는 더 강조된다고 느낀다.
아직 사람들이 거의 없을 때 그림들과 독대하는 희열을 내일로 지연하기로 하고 어두운 방을 나선다. 여기서 머뭇거리기에 내 욕망이 약속한 그림이 이 건물 안에 너무 많아 마음이 조급하다. 늘 조감도와 지도를 원하는, 그러나 그 욕망을 충족하기에 불충분한 지성만 갖춘 나는 아직 모든 그림들의 자리를 알지 못한다. 다 빈치를 (잠시) 등 뒤에 두고 앞으로 걸어 나간다. 얀 반 에이크 말고도 이 미술관이 갖고 있었던, 나는 미처 알지도 못했던 북유럽 화가들의 흥미진진한 페이지들을 넘기기 위해. 나만의 추억을 자극하는 ‘산 에우스타키오의 환시’에서 작은 도판이 미처 전하지 않던 환상 앞에 걸음을 멈추기 위해. 그다음에는 피렌체 밖 중부 이탈리아의 제단화들을 보기 위해, 만테냐와 벨리니의 겟세마네 동산이 마침내 팔뚝을 맞대고 걸린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기껏해야 아름다운 성모나 그리던 벨리니의 어마어마한 분홍빛 여명에 눈부시기 위해. 마침내 꿈에 그리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예수 그리스도 세례’ 앞에 다다르기 위해. 예수 발밑으로 하늘보다 더 순수하게 하늘색으로 반사되는 물 위의 정경과 예수 머리통 위로 너무나 적절한 높이에 위치한 비둘기를 한참 바라보기 위해. 그 옆에 선 천사 중에는 이상할 것도 없이 관람객을 응시하는 시선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와 눈 맞추기 위해. 내셔널 갤러리 유튜브 채널에서 복원 과정을 설명하던, 만나면 인사하고 말 것 같이 내게만 친근한 복원사 덕분에 더욱 친밀함과 애정을 갖게 된 ‘그리스도 탄생’ 앞에서 한참 흐뭇한 미소를 짓기 위해.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척박한 언덕의 지형과 지질을 살피며 이제 차례가 됐다고, 다음에는 산세폴크로에 가서 그림 속 같은 고장인지 봐야겠다고, 그리고 거기 있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부활’을 봐야겠다고 받아들이기 위해.
두 시간 동안 완전히 말라있던 무언가가 충분히 적셔진 만족감 같은 걸 느꼈다. 남은 방들 중 티치아노 방에서, ‘바쿠스와 아리아드네’는 무엇보다 푸른 하늘이라고, 현대 미술 이전에 색이 이렇게까지 의미를 갖는 그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옆의 ‘나를 만지지 말라’가 훌륭해도 이 푸른색은 그 이상을 말한다고도.
그쯤에서 이미 지쳐버려 이전에 절반을 봐둔 적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네 시에나 겨우 미술관을 떠날 수 있었다. 그것도 내일을 기약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다시, 약속된 일을 하기 위해 출발한다. 제대로 보기 위해 배를 불려주고 카페인도 넣어주었다. 두 번째 보는 이들은 다른 말을 해줄까? 나를 지루하게 할까? 내일 무엇을 쓸 수 있을지 가급적 기대 없이 지내기를 스스로에게 권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