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 성 안나와 성 모자(루브르, 파리)
다행히도 모나리자를 제외하면 루브르의 다른 다빈치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특히 두 번째 방문했던 오후 늦은 시간이 그랬다. 먼 길 간 김이도하고, 북유럽 회화관은 개방 일정이 따로 있기 때문에 애초에 두 번 예약해 두었다. 다만 두 번째 방문 며칠 전, 매우 흥미로운 메일을 받았다. 나는 그날 거의 첫 타임슬롯에 예약해 두었는데 박물관 사정으로 오픈이 늦어질 수 있으며 최소한 열 시에는 오픈할 수 있기를 자신들도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이 유감스러운 상황의 주체가 발신자는 아니라는 듯 기묘하게 완곡한 이 문장은 혹시 프랑스적인 것인가, 생각하며 나는 혼자 껄껄 웃었다(사실 웃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예기치 않은 변화와 불확실성에 취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당일 아침 열 시에 방문했을 때, 여전히 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긴 줄 옆에 선 안내직원에게 어떻게 될지, 나는 뭘 할 수 있을지 물었다. 그녀는 아직 언제 문을 열지 알 수 없으며, 오늘 오전 티켓 예매자들은 하루 중 언제라도 다른 출입구를 통해 입장할 수 있다고 답해주었다. 그녀는 내 앞사람에게 막 같은 답변을 한 직후였는데 내가 떠나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받는 것 같았다. 나는 곧 의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순순히 그날 일정을 바꿔 오르세와 퐁피두에서 놀다 오후 세 시쯤 루브르에 입장했다. 다들 비슷한 일정으로 움직였는지 줄이 길어 예약이 무색하게 오래 기다렸지만 나는 노력했다. 무릇 여행이란 이런 것이지. 뜻대로 다 될 리가 없지. 낭비는 인생의 정상적인 일부지.라고 생각하며 불확실성을 끌어안기 위해. 혹은 불확실성을 감당할 수 있는 작고 가볍고 안전한 것으로 전화시키기 위해.
성 안나와 성 모자(1510년 경, 루브르, 파리). 나란히 걸린 다빈치 다섯 점 중 나는 이 앞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아마 그림에 담긴 이야기 때문인 것 같다. 이야기는 몇 년 전 한 다큐멘터리에서 들었다. 루브르 소장품을 중심으로 다빈치 작품과 예술세계를 다룬 'A Night at the Louvre(2021)'였다. 통상적인 성 모자 그림에 성모의 어머니 성 안나를 조합한 이 작품에서 성모 마리아는 여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안으려 하지만 예수는 나는 가야 하네, 인간의 구원자 아닌가, 라고 말하는 듯 성모 마리아로부터 몸을 등지고 있다. 이미 자신의 숙명을 알고 받아들였으므로 성모 마리아의 인간적 모성애를 거절하는 예수, 마찬가지로 아들의 운명을 알면서도 그를 이 세계에 붙들어두고 싶어 하는, 잠시나마 자식으로서 사랑하고 싶어 하는 성모 마리아. 이렇게 두 인물의 갈등하는 입장과 주장을 시간이 멈춰 있는 그림 속에서 다큐멘터리는 읽어내고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참 절절하다고 생각한다. 아들을 아들로 대할 수 없는 인간 여자 어머니의 마음 같은 것을 떠올려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되 어머니 될 일은 없는 나지만 성모도 참 기구한 운명이로구나, 어떤 면에서는 딱하구나, 공감하게 된다. 인류의 구원자로서 대속할 운명을 진 아들을 낳아버리다니. 수태고지 모티프는 때로 백합을 들고 온 대천사 가브리엘의 고지(그 고지는 시모네 마르티니처럼 그림 위에 엠보싱 처리한 글자로 때려 박아버리는 무자비한 발표 Anounciation일 때도 있다)를 거절하는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데 매우 납득할만한 결정이라고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물론 결국 승락하지만. 몇 십 년 후 모자의 모습은 피에타라는 이름의 그림과 조각으로 수없이 재현된다. 죽은 예수와 십자가에서 내린 아들을 보고 극도의 슬픔에 혼절하거나 혼절할 지경인 성모는 강력한 감정적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모티프임에 분명하다. 위 그림 속 두 모자는 이 미래로부터 도망가지 못한다, 아니 도망치지 않는다.
나는 신을 믿지 않으므로 이 모든 이야기는 내게 인간 세계의 비유 혹은 은유로서 읽힌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이 이야기를 쉽게 떨치지 못한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나 한강의 '소년이 온다'처럼. 안중근 의사나 박종철 열사처럼. 사자왕 형제를 예외로 하면 고통으로 일그러진 피에타는 인간 세계에 실재하는 이야기로 금세 구체화 된다. 아르헨티나에서 우리 아이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야만 했던 오월 어머니들처럼. 그리고 그들과 결연을 맺고 있다는 광주의 어머니들처럼. 그것은 신화나 소설이 아닌 역사이며 나 같은 뼈와 살로 이루어졌던 어떤 사람의 삶에 관한 것이다. 나는 누구의 어머니도 아니면서 이런 이야기를 고통스러워 견디기 어려워한다.
다빈치 그림 속 성모 마리아와 성 안나의 표정에서 다빈치 특유의 스푸마토 기법이 이뤄낸 부드러우면서도 어딘지 알 수 없는 표정 같은 것들에 대해 우리는 분명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나리자의 알 수 없는 미소나 그 미소를 닮았다고들 흔히 말하는 세례자 요한(1514년 경, 루브르, 파리)의 표정에 대해서처럼 말이다. 다큐멘터리는 다빈치가 단순히 보이는 것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것, 그러니까 생각과 의식과 감정 같은 내면을 묘사하는 지경에 이르고자 했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 주장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다빈치는 현실의 물리적 실재를 재현하는 데 매우 뛰어났다. 그가 적용한 원근법이 기술로서 목적한 바였을 것이고 그 결과는 놀라운 성취로 판명되었다. 물론 내게 근거는 없지만 이 그림에서도 세 인물 뒤 펼쳐진 배경은 상상이 아닐 것이다. 희미한 배경에는 공기 원근법 같은 것을 떠오르게 하는 면도 있다. 마찬가지로 '암굴의 성모' 배경은 다빈치가 밀라노 이주 전까지 살던 피렌체 혹은 토스카나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을, 밀라노 이주 이후 알프스 주변을 여행하면서 실제로 보게 된 풍경을 채택했을 거라고 주장하는 다큐멘터리도 있다. 이 주장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다빈치가 얼마나 관찰에 의거한 그림을 그렸는지, 관찰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그가 궁극적으로 목표한 것이 인간의 내면, 그 관찰 불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이 내게는 논리적으로 너무 재미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을 그다지도 탁월하게 표현한 자라면 응당 시도했을 법한 도전이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그가 보이는 사물만큼 내면을 적확하기 묘사했는지 나는 답할 수 없다. 내가 모나리자나 세례자 요한, 성모가 아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와도 그 순간 자기 마음을 그렇게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순간의 것인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잘 잊는지. 그들이 인간이라면, 하고 한 인간으로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보이지 않는 것, 관찰할 수 없는 것을 어느 한 가지 고정된 의미로 해석할 수 없도록 흩어버림으로써 다빈치 작품들이 진정으로 위대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완벽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이끌린다. 정확히 말하면 이해하기 위한 시도를 결코 멈출 수 없게 된다. 다빈치, 이 자 코덱스에 뇌과학 챕터라도 있는 것인가. 재수 없지만 인물은 인물이다.
한편, 그림 속 아기 예수 표정은 훗날 부활한 예수의 '나를 만지지 말라 Noli me tangere' 모티프를 상기시킨다. 이때 거절과 금지의 상대는 성모 마리아가 아닌 막달라 마리아다. 특정 그림을 떠올리지 않은 채 이 말을 하는 내 상상 속 예수는 엄격하고 비인간적이다. 잔인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권위 있고 감정적으로 다른 차원에 속한 듯하며 교감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다.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부활한 예수가 과연 인간일 수 있겠는가. 다빈치 그림 속에서 성모 마리아의 모성애를 거절하는 예수 표정을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아마 불가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언어로 표현하자면, 친절한 정색이랄까. 어머니에게 가지는 것이 내게는 완전히 불가능해 보이는 권위가 부드러운 표현, 안정된 구도에 긴장감을 조성한다. 내가 그들을 향해 품은 일말의 애틋함도 예수의 차가운 표정에서 완곡하게 차단당한다.
'나를 만지지 말라'를 떠올리게 된 다른 계기를 나는 알고 있다. 이번에 내셔널 갤러리에서 볼 수 없었던 동명의 티치아노 작품 때문이다. 보지 못한 그림은 볼 때까지 나를 놔주지 않으리라. 미련, 그 인간적이고 명쾌한 감정에 나는 적당한 에너지를 늘 성실하게 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