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1954(2023), 아르떼
사강은 트레바리 시절 얻은 좋은 독서 경험 중 하나다. 그전까지 작가의 너무 알려진 책들(‘슬픔이여 안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같은)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유명한 문장을 나는 의식적으로 기피해 왔다. 어떤 유행과 명성은 유난히 날 질리게 한다. 클리셰가 되어버린 문장과 문구들에서 자극적일 뿐 설익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인상이었다. 인상은 실재를 확인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먼저 읽었다. 날이 맑아도 폭풍이 쳐도 풍광이 좋은 서귀포칼 로비에서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걸 아까워하며 읽은 기억은 내 한 줌짜리 독서 경험의 가장 빛나는 위치를 차지한다.
자신에게 열광하는 젊고 아름다운 남자 대신 자기에게서 끝없이 미끄러져나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한 충실하지 않은 닳고 닳은 늙은 남자를 선택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중년 여성이 감각하고 판단하는 순간이 매우 예리하게 포착되어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쓰여 있었다. 내 가치관, 내가 할 법한 결정과 상관없이 인물의 내적 일관성은 충분했고 개성을 구축했다. 다음이 궁금한 와중에도 책을 잠시 덮고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야 마는 순간을 날카롭게 잡아채 그 순간을 적확한 문장들로 써내고 있었다. 그 날카로움과 미세함, 적확함은 쉴 새 없이 나타나 작가에 대해 갖고 있던 내 인상을 꽝꽝 부쉈다.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치밀한 겹이 무척 탁월해서 자주 감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맥상 의아한 부분들, 의미를 정확히 확정하기 모호한 부분들이 내게는 있었는데 그 의아함과 모호함의 일부는 언어와 문화의 간극에서 발생한다는 심증을 여전히 품고 있다. 모호함을 걷어내고 더 정확하게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프랑스어를 배워 직접 읽고 생각하고 싶던 열망은 잊히지 않고 여전히 여기 있다.
내가 품은 의아함 중에는 작가가 주인공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 비판일까? 수긍일까? 관습과 사람들 시선을 자주 명확히 의식하고 그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인물. 그에 대한 작가의 판단을 나는 쉽게 읽어낼 수 없었다. 사실 작품을 읽은 직후에는 인물에 대한 작가의 판단이 없다고 생각했다. 관습에 얽매인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관점이라는 가능성은 작품 해설에서 제기되었다. 내가 읽어내지 못한 걸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작가의 입장을 읽어내기에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겹들이 있을 수 있었다. 투명해 보이지만 통과할 수 없는. 그게 시대와 장소, 문화와 언어라는 심증에는 여전히 확증이 없다.
‘엎드리는 개’에 대해서도 원인이 같아 보이는 궁금증이 여럿 있다. 그와 상관없이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한다. 사회적인 ‘옳음’의 테두리를 아슬아슬하게 시험하고 그러면서도 명백한 ‘유리함’, 이익 앞에서 머뭇거리며 마침내 자신도 이해 못 할 (망할) 열망 앞에 무릎 꿇는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한 통찰이 역시 예리하게 호를 가른다. 때로 인간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욕망 앞에 일인칭 소유격을 붙이는 게 옳기는 한 걸까 싶을 정도로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내 욕망의 통제할 수 없음, 그 거추장스러움. 우리는 그렇게 원하지도 않는 욕망으로 크고 작게 중대하고 사소하게 수도 없이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고 또 저지른다(말이 나와 말이지만 대체 이 욕망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어째서 의식의 주체인 ‘나’의 의지 밖에서 그다지도 강력하게 생겨나고 또 작동하는 것인가? 그래서 그 주체조차 저항할 수 없다는 열패감에 빠지게 하는 것인가?). 이 작품에는 욕망의 통제할 수 없음이라는 좀처럼 탐구되지 않는 면이 잘 포착되어 있다. 이토록 바보 같은 인간들, 그러니까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비난과 비판의 뉘앙스 없이 그저 그렸다고 이 작품에 대해서는 좀 더 확신한다. 이건 교훈을 주려는 소설이 아니다.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연민의 느끼함을 걷어낸 채다. 작가는 주인공을 옹호하지도 않는다. 내가 제대로 읽었다면 사강은 환영받지 못할 불편한 감정적인 순간, 그 미묘한 지점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긍정이든 비판이든 별 판단 없이. 당연히 나무람도 없이.
사강을 더 읽고 싶어 졌을 때 어쩔 수 없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슬픔이여, 안녕. 첫 페이지를 열고서야 알게 되었는데 나는 이 책에 대해 제목 말고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화자도 줄거리도 읽어가며 알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독서 방식은 아니다. 나는 결론을 알고 읽는 쪽을 좋아한다. 줄거리 밖에서도 생각하고 감각할 수 있도록. 그렇지 않으면 한 번 읽는 걸로는 충분치 않을 때가 많으므로.
고백해야겠다. 이 작품 역시 읽는 내내 내게 충격을 주었다. 그것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그중 가장 구태의연한 것을 들자면, 1950년대 중반, 출간 당시 이 책을 어떤 보수적인 집단과 사람들은 악마라고 생각했을 거라는 추측을 확인하고 싶어 나는 약간 안달하며 읽었다. 아무리 개방적이고 자유를 신봉하는 프랑스라 해도, 역시 구태의연한 말이지만, 이 책은 파격적이다.
단순히 소녀가 쉽고 가볍게 남자를 만나고 다녀서가 아니다. 실은 전혀 아니다. 화자가 때로 ‘천박하다’고 스스로 표현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권리 주장 때문이다. 진지한 관계와 삶의 주제들을 애써 비껴있는 일군의 인간들 혹은 그 같은 욕망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책을 나는 이전에 읽은 적이 없다. 여기 더해 이 욕망은 자신이 온전하게 존재할 권리를 주장한다. 화자 스스로 ‘천박’하고 ‘가벼’우며 ‘진지하지 못하다’고 수식하는 것과 달리, 혹은 바로 거기서 발생하는 자기 존재 양식과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그는 일련의 계략을 꾸미고 그것이 실행되도록 한다.
자기 존재 양식을 인정하고 납득한다는 것은 그것을 폄훼하는 사회 속에서 흰 눈을 하고 바라보는 타인들을 인정하고 납득한다는 것과 별개의 사건이다. 후자에 대해 화자가 품고 있던 은밀한 저항감은 한 여성에게 표출되고 그 결과는 폭력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파국. 한 인간의 파국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 실행했던 일이 타인을 파괴하는 결말이 되는 아이러니. 작가는 이 아이러니로부터 화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화자 역시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느낀 갈등과 부조리의 다양한 면면을 외면하지 않고 솔직히 서술함으로써 자유의 실현이라는 욕망에서 파생한 일말의 모순은 오히려 순순히 전모를 드러낸다.
사십이 넘어서야 나는 타인이 나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그 같지 않음에 대한 분노, 나와 같게 만들고 싶은 통제 욕구, 그 통제 욕구의 좌절에서 오는 또 다른 분노, 무엇보다 자기 몸 밖의 것을 통제하려 욕망의 비윤리성에 대한 인식, 스스로 비윤리적인 욕망을 당연히 충족하려 때로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는 자각에 따르는 당혹감과 혼란이 이 통제 욕구를 발견하고 의식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고통스럽게 뒤따랐다.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사강의 주장이 맞다고. 그걸 결정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자신뿐이라고. 그러나 때로 우리는 내 몸 밖에 대해 통제력을 가지려 무리하고 거기서 생겨나는 인간 사이의 갈등에는 끝이 없다. 그 갈등은 의도와 상관없이 크고 작은 폭력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트레바리에서 ‘엎드리는 개’와 함께 ‘해독 일기’를 읽었는데 여기에는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성실함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토록 시크하고 아방가르드한 인물이 이토록 순종적이고 헌신적으로 글쓰기에 임했다는 증거 앞에 놀라움을 표한 건 그날 나뿐만이 아니었다. 문제적인 작가가 성실하게 쓴 반백년 전 작품들을 나는 동시대 작가들보다 가깝고 친숙하게 여긴다.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그의 다른 작품을 찾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