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나만의 도슨트, 루브르 박물관(2022), 큐리어스
올해 3월 미술관 기행을 준비하면서 루브르 관련 책은 두 권을 읽었다. 마로니에북스의 세계미술관 기행 시리즈 중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이 책, ‘나만의 도슨트, 루브르 박물관(서정욱, 2022, 큐리어스)’이다.
지금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루브르’로 검색하면 책 94권이 조회된다. 철학, 음악, 만화 등과 결합된 방식이 포함된 숫자지만 내셔널 갤러리 검색 결과가 같은 방식으로 24건, 우피치 미술관이 6건임을 견줘보면 미술관 중에서도 루브르에 집중된 관심은 눈에 띈다.
그런고로 주요 작품을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소개하고 있을 마로니에북스 시리즈 외 한 권을 고르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사실 기대감도 전혀 없었다고 고백한다. 책 소개를 읽으면 예상대로 내가 찾는 책이 아님이 확실해졌다. 내가 찾는 책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돌아보면 당시에는 내게도 분명했던 것 같지 않다. 그에 비하면 내가 피하는 책의 기준은 매우 명확했는데 그림을 ‘둘러싼’ 이야기와 그림이 ‘재현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된 책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많은 책들이 미술사나 교양의 이름으로 이런 이야기들만을 퍼뜨리고 있었다. 자극적인 사연으로 잠시 사람들 눈을 사로잡는 그림 밖의 이야기들을 게다가 지겹도록 반복했다. 도넛이나 베이글과 같은 이야기 방식이었다(도넛과 베이글을 폄훼하는 건 아니다. 나는 이 두 식품을 좋아하는 편이다). 한참 읽고 보면 중심부는 비어 있었다. 그 유일한 구멍은 그러나 거대하고 중대한 것임이 분명했다. 그림 그 자체이니까. 이런 ’스토리텔링‘이 그림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내게는 음악, (특히 고전) 문학 등 창작품 일반에서 관찰되는 보편적인 현상처럼 보였다. 나는 이 현상이 지루하고 지겨웠다.
물론 나는 자랑스러운 (한때의) 사회학도로서 창작품 생산의 주체와 과정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창작품뿐 아니라 해당 시기, 해당 지역 창작 필드와 사회, 인간들에 대해 매우 훌륭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또한 창작과 예술을 신비와 신화로부터 구해내고 마침내 땅에 발 디딘 인간의 생산물로서 그들이 온당한 지위를 회복하게 하는 데 사회학만큼 유용하고 유효한 방법론은 드물다고 확신한다. 사회학은 분석 대상으로 삼은 모든 소재에 대해 이런 기능을 할 수 있는 학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사회학이 인류에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기여이며 효용이기도 하다. 말하고 보니 이에 대한 논증은 몇 백 페이지 분량의 책을 필요로 하는 방대한 것이므로 여기서 멈춰야겠다.
여기서 중요한 건, 창작물은 그 내적 기준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평가될 수 있으며 당연히 너무도 그럴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내적 접근이 더 유용하고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더 유효한지는 당연히 개별 작품과 작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능한 감상자 혹은 비평가는 대상으로 하는 작가 혹은 작품을 어떤 관점에 집중해 설명할지를 애초에 탁월하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 탁월한 선택이 시작인지 끝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감상문과 비평 역시 그 자체로 독립적인 창작물이니까. 완성되기 전에 그 끝을 완전히 예견하고 가늠할 수 있는 천재를 솔직히 지금의 나는 믿지 않으므로.
그러니까 나는 그림 자체에 대한 서술이 그를 둘러싼 이야기들만큼은 생산되었으면, 최소한 양적으로 대등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품었던 것 같다. 지금 한국에서 창작물에 대해 말하고 글쓰는 방식이 지나치게 비대칭적이라는 내 인식에 근거해서 말이다.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도넛과 베이글처럼 창작물을 둘러싼 이야기만이 존재하는 게(그나마도 위에 언급한 사회학적 분석 같은 것과는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에 그친다. 그래서일 것이다. 때로 이 에피소드들은 내게 가십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게 그 창작물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라는 질문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창작물 자체에 대해서는 정작 진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게, 다시 말하지만 지루하고 지겨웠다.
내가 생각하는 창작물에 ‘대한’ 이야기, 내적 접근은 새로운 것도 아니다. 매체와 표현 형식의 특성에 따라 이미 해당 분야에서 발전시켜 온 기준으로 그것을 보는 것이다. 그림이라면 색채와 선, 구도, 작품의 크기, 재료, 기법 같은 것에 대한 탐색일 것이다. 글이라면 언어와 언어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내적인 논리의 전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멈추면 대개는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일 감상자들에게 깊숙이 침투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작품 자체에 집중한 탐구가 결국에는 감상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창작품들, 그러니까 예술작품들은 각각의 표현 방식이 결국 인간 감각 수용기관에 자극을 만들어내고 그 감각적 자극들은 개별 인간의 뇌에서 보다 종합적이고 추상적인 느낌과 생각을 추동한다는 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감상’이기 때문이다. 감상은 근거를 갖고 그 근거는 그 감각을 일으키는 대상이다. 물론 개별 인간의 매우 특수한 감각에 매우 크게 의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으로서의 창작물이야말로 이 모든 감상, 그 황홀한 난리법석의 원인이자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감각한다. 선과 색과 질감을 보고 강하고 여린, 높고 낮은 음이 커지고 작아지는 파동을 듣는다.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어떻게 그림과 음악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 ‘나만의 도슨트, 루브르 박물관’도 대부분 의무감 비슷한 것으로 읽었다고 고백한다(병렬 독서 유행 전에 이미 너무 병렬이던 나는 유행에서 이탈해 올해 직렬 독서를 시도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렘브란트 전까지. 특히 젊어서부터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작품 세계를 변화시켜 온, 평판과 상관없이 자기 시도를 해온 작가를 그림에서 읽어내는 부분이 내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물론 그 마음은 창작물과 그에 대한 타인의 평가 사이에서 완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주저하는 예비 창작자의 것이었음을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조금 더 진지한 독자가 된 후 읽은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망트의 다리> 챕터가 나는 가장 좋았다. 이 책을 읽고 다음에 루브르에 가면 꼭 보겠다고 다짐한 그림이 있다면 바로 이 그림이다. 작가의 말처럼 언뜻 그저 그런 풍경화처럼 지나치기 쉬운, 무난하고 그래서 눈에 띄지 않을 이 그림이 특별한 이유를 작가는 거의 온전히 그림에 대한 내적 접근, 자신만의 시각적 분석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 설득이 내게는 통했다.
이 책을 통해 그림 그 자체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는 취지를 밝히는 작가의 말도 진지한 독자가 된 후에야 뒷 표지에서 읽었다. 그 시도가 얼마만큼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의도가 매우 반가웠다는 사실만을 여기서 강조해두고 싶다.
음악계에서도 같은 의도로 음악을 알리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유튜브 1분클래식 채널을 운영하는 박종욱 PD다. 그의 접근이 큰 반향을 얻길, 그가 대중적이 되기보다는 대중이 그의 접근에 익숙해지고 물들기를 기대하며 이 모범생의 활동을 지켜본다. 역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일구쌤은 지금 발매된 앨범, 지금 연주자들의 지금 공연을 매우 구체적으로 소개하는데 사실 이 영상들을 유심히 보곤 한다. 내 감상문 쓰기와 결이 비슷하게 느껴져서다. 분석의 심도는 언제나 고민스러운 문제다. 유정우 아저씨가 나오는 편을 유심히 보는 건 그 때문이다. 볼 때마다 오래 많이 들어온 구력은 대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반복해 이른다.
아마추어 음악 감상자로서 ‘사랑하는 마음’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굴려온 질문이었다. 창작품에 대한 감상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을 써야 할 것인가? 쓰지 말아야 할 것인가? 내 감상문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어느 부분에서라도 발견되는가? 여전히 아마추어로서 그러나 더는 그것을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감상문 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내 중간 답변을 점검해보게 해 준 책, 서정욱의 ‘나만의 도슨트, 루브르 박물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