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중 시 농도가 부족해

김혜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강성은, '슬로우 슬로우'

by 만정

혈중 시 농도가 부족해. 이런 생각을 내가 하는 날이 오다니. 인생이 참 신비하고 놀랍다.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클리셰에 깃든 비범한 진실을 마침내 마주한다. 살수록 더 무궁무진 놀라운 일을 경험할 생각을 하니 신나서 현기증이 난다.

지난여름 내 시 생각을 거의 안 했다는 충격적인 자각에 뒤따른 감각인 것 같기도 하다. 읽지도 쓰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시적인 순간을 떠올리지도 않은 채였다. 일이 바쁜 시기여서 거기 집중하기도 했었고 그림이라는 새로운 엔터테이닝을 개발하느라 다른 관심 영역에 불을 비출 여력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 더위가 나를 소진하고 있었다. 가진 장비와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방어했지만 아마 내년에는 보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열대야가 시작된 날부터 거의 매일 서너 번씩 깨는 잠을 잤는데 내게 익숙한 경험은 아니었다. 지난주 들어 이틀 밤 깨지 않는 잠을 잤는데 엄청난 숙면이었고 다음날 내 생산성은 최고치였다. 그즈음이었다. 시 생각이 난 건.


전미도서상 수상작이기도 한 김혜순 시집 '날개 환상통'을 읽으면 누가 데미안을 읽으며 그랬다는 표현처럼 눈에서 껍데기가 벗겨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는 그랬다. 총천연색 폭죽이 터지는 맛이 난다. 언젠가 김기택 시인이 김혜순 시인에 대해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시상을 굴리다 일필휘지 써내는 모차르트 같은 예술가라고. 눈에서 껍질이 벗겨지는 듯한 경험과 함께 그의 천재성에 대한 진술은 더 공고한 사실로 내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특히 '할머니랑 결혼할래요'가 좋아서 그 시 얘길 써봐야겠다고 이틀쯤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발견한 바, 시인의 새로운 시집이 출간되었다.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내가 좀 더 즐거울 수 있도록 강성은 시인도 신간을 내주었다.


'슬로우 슬로우'. 과제로 읽었던 강성은 시인 'Lo-fi'를 나는 무척 즐겼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알라딘에 나타나면 일단 확인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시집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기까지 적잖이 노력한 건 사실이다. 열심히 읽고 난 후 그 노력이 필요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때문이었다(물론 이건 서로 다른 개체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유령은 예외로 안다).

그 책에는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꿀 수 없는 종류의 꿈에 대한 진술이 가득하다. 반복이 상쇄와 누수 없이 성실히 누적되고 증폭되어 불안과 공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런 꿈, 그러니까 일종의 악몽, 피곤한 꿈, 그러나 깨고 나면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안도할 꿈(그러나 그 꿈에서 깨어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므로 깨어날 기약이 없어 빠져나올 도리 없이 무서운 시).

그 사실을 이해한(혹은 이해했다고 생각한) 후로는 시집이 재미있었다. 신선했다. 그래서 그의 새 시집 소식이 반가웠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만 비가 올 줄 모르고 알라딘 새벽 배송으로 주문했다. 새벽 5시 반 계단을 오르는 쿵쿵 소리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설렜다.


그래서 오늘은 쓰는 대신 읽는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는데, 올해 처음으로 읽는 욕망이 쓰는 욕망을 압도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늦게 배운 새로운 엔터테이닝 기술이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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