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에스테의 언덕길, 스가 아쓰코, 뮤진트리, 2024
또 한 권 병렬독서를 끝냈다.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이다. 병렬이라기보다는 간헐적 독서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알라딘 주문 기록을 보면 작년 9월 말 입수했으니 일 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본문 열두 개 챕터에 다소 이질적인 ‘부록’ 한 챕터, 작가 작고 후 쓰였을 편집자 회고와 옮긴이의 말이 짧게 붙어 300페이지를 가까스로 넘긴 작고 가벼운 책이었다. 그렇다, 작고 가벼운. 물리적으로는.
어째서 이 책을 산 걸까? 다 읽고 나서 두 번째 든 생각이라는 게 다소 황당한 면이 없지 않았다. 누가 시켜서 산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 대부분의 알라딘 주문이 그렇듯 내가 고른 책이 확실하다. 같은 주문에 하루키 에세이 ‘먼 북소리’가 있는 것으로 봐선 높은 확률로 이탈리아 주제에 의한 구매였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이탈리아를 그리워하니까. 책이라도 읽으면서 그리움을 달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기에도 스스로에게는 좀 웃긴 일이다. 불과 몇 주 전 이탈리아 여행을 끝냈을 시기이기 때문이다. 웃기거나 말거나 내가 원하거나 말거나 그것이 내 내적 진실이었으리라.
게다가 트리에스테라니. 누가 이탈리아 여행을 가서 트리에스테에 가겠는가. 나만이, 그저 좋아하기 때문에 전부를 알고 싶어 한다고 밖에는 그 욕망의 궁극을 설명할 도리가 스스로에게도 없는 나 같은 이들만이 그 외진 북동부 도시에 호기심을 가질 거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부당한 면박을 준다.
60년대 이탈리아 거주 경험이 있는 일본인 여성이라는 저자 이력도 책 구매 결정에 고려했을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저자 특성은 이 에세이를 특별하게 만드는 조건이므로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에세이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사실 드러나야만 하는, 그리고 드러났을 때 가장 매력적인 지점은 언제나 저자의 관점 그 자체이므로. 그리고 그 관점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자주 그의 존재론적인 조건에 깊이 닻 내리고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300 페이지 중 100 페이지를 읽는 데 12개월이 걸렸다. 그다음 100 페이지를 읽는 데 2주가, 나머지 100 페이지를 읽는 데는 닷새가 걸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100 페이지 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목차로 따지면 ‘굴다리 너머’라는 제목의 글이 위치한다. 이 글이라면 책 전체 흐름에서 확실히 변곡점이라 할 만하다. 여러 의미에서 그런데, 그중 하나는 이 책이 죽은 남편에 대한 회상일 뿐 아니라 그 일가에 관한 기억임을 매우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챕터이기 때문이다.
지지부진하게 끌어오고 있었지만 이 책을 중도에 처분하지 않은 건(그렇다. 나는 다 읽었고 소장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한 책과 둬도 더는 읽지 않을 거라고 결정한 책을 주기적으로 알라딘에 중고로 팔고 있다. 우리 집은 에코의 서재가 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읽을만한 여지가 지지부진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앞의 세 개 챕터쯤은 그런가 보다, 하고 읽었다. 나에게 즉각 연결되지 않는 독서가 머무는 심리적 지점이다. 이 책 초반부에서 내게 곧장 닿도록 대고 있던 가느다란 선은 20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풍경이었다. 책 추천사에 언급되는 죽은 남편에 대한 회고적 정서 같은 게 아니었다. 트리에스테라는 지역의 현재 풍경은 잠시 방문한 여행자인 저자 관점에서 매우 주관적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에는 지역의 복잡한 역사와 이력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나는 이런 글을 좋아하고 쓰고 싶어 한다. 이 지점이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장르적 특기일지도 모르겠다. 서사는 현재를 묘사하면서도 농축된 과거를 단숨에 전달하기 그리 어려운 매체가 아니다. 예를 들어 시각예술에 비하면. 그림이 한눈에 과거까지 보여주기란 훨씬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여하간 읽고 나면 나도 그 언덕길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정도의 힘은 너끈히 가진 글이다.
그러나 그 정도였다. 게다가 작가의 문체에 적응이 필요했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이 책의 정말 많은 문장들은 잘못 쓰여있다. 수식하는 구조의 잘못된 위치 때문에 불필요하게 여러 다른 의미로 읽힐 가능성을 담지해 버리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중의적인 문장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이 책의 경우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의미가 불명확한 문장을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내 무의식이 작동하면서 정신 차려보면 같은 문장을 반복해 읽고 있었다. 이 무의미한 공회전 때문에도 이 책을 읽어내는 진도가 더뎌졌다. 번역 문제일까도 생각해 봤지만 어순과 문장 구조가 거의 같을 일본어를 직역한 데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이 문장 구조는 아마도 작가 자신의 스타일일 것이다. 내게는 그 스타일이 불필요하게 번거로웠다.
이런 초반부 글들이 그러나 좀 더 전통적인 에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에 대해 작가는 여유 있는 거리를 확보하고 있고 자연스럽게 관조적이다. 그러나 이를 ‘전통적’이라고 굳이 이름 붙인 더 큰 이유는 ‘굴다리 너머’의 매우 이례적인 측면에 기인한다.
‘굴다리 너머’는 좀 이상한 산문이다. 죽은 남편의 아버지, 작가가 결혼하기도 전에 이미 죽은 시아버지가 소재이자 주제라는 점에는 이상할 게 없다. 다만 특징적인 데는 있는데, 작가가 시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사실은 직접 경험이 아닌 간접 경험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이제는 말이 없는 죽은 시아버지를 둘러싸고 그를 아는 사람들, 시어머니와 남편, 그의 형제가 언급한 사실들을 그를 직접 만난 적 없는 작가가 재구성한 것이다. 가족들이 언급하는 것과 언급하려 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작가는 경험한 적 없는 한 사람을 탐구한다. 그의 드러난 행적에서 시작해 그런 행적을 그린 한 인간의 내면, 생각과 감정까지.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죽은 시아버지의 내면이 불쑥 자기 목소리로 독자에게 말하는 것이다. 산문의 중심소재가 글의 화자가 되다니. 나는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느낌을 가졌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본다, 추정해 본다, 식으로 작가의 관점을 작가의 목소리로 드러내는 평범한 방식을 완전히 뛰어넘어, 아끼는 자식을 둘이나 잃고 진보적이고 공동체적인 자기 신념과는 배치되는 파시즘의 정치 상황 속에서 그다지 원하지 않는 방식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줄 타듯 이어가는 한 남자가 자기 목소리로 불쑥 갑자기 말을 하는 것이다.
정말 급작스러운 순간이었다. 쉽지 않은 문제지만 내게 에세이와 소설/시/희곡의 가장 큰 차이를 들라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에세이의 화자는 명확히 언제나 작가 그 자신이라고. 소설과 달리 에세이는 작가와 분리된 화자를 세울 수 없는 장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에세이는 작가의 목소리로 그가 보고 관찰하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쓰게 되어 있는 장르다. 에세이에 허구가 없는 건(그 자신이 글을 얼마나 솔직하게 쓰는가 혹은 그 자신에게 솔직한가와 상관없이) 이 때문이다. 허구가 있더라도 그 허구가 작가 자신의 상상이거나 그가 생각하는 제삼자의 감정과 내면이라는 사실은 에세이 안에서 액자에 든 그림처럼 테두리를 갖는다. 그것은 독자가 쉽고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굴다리 너머’도 대체로 그렇게 쓰여있다. 앞부분에서 화자는 분명 작가 자신이다. 물론 화자는 죽어 자기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시아버지에게 상당히 감정이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글에 충분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즈음에 이르러서는 감정이입하고 있는 화자 자신을 넘어서 아주 시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와버린 것이다. 어떤 예고도, 구조적 발전 과정도 없이 일어난 사건(내 생각엔 사고인데)이다. 이 부분이 매우 인상적인 데에는 장르적 위반에 기인한 이런 이상함이 있다. 이상한 것과 상관없이 이 부분은 책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이었다.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여기서부터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갔을지 모른다고 독자를 긴장하고 각성하게 하는 매우 신비로운 순간 말이다.
편집자가 작가 회고에서 스가 아쓰코 글의 어떤 면이 매우 소설적이라고 말하는 데 내가 동의한다면 바로 위 지점에서 뿐이다. 편집자는 작가 특유의 묘사가 소설적인 특징이라고 지목하지만 묘사는 에세이에서도 요긴한 기술이다. 묘사는 소설의 전유물이라는 편집자의 전제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편집자가 하려 했던 말은 작가의 묘사가 소설만큼이나 대상을 강력하게 재구성했다는 말이라고, 단지 눈에 보이는 현실 그대로가 아니라 그것을 작가의 의도에 따라 더 선명하고 농도 짙게 편집했다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역시 당연히 산문 본래의 기술이라고 주장하면서.
이후 이어진 장들은 시댁 일가에 대한 인물 스케치라는 면에서 맨 앞에 배치된 표제의 장과 ‘히야신스의 기억’을 오히려 전체 책의 맥락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역전시킨다. 내가 후반부의 이야기들을 훨씬 좋아했음은 분명하다.
특히 60년대 밀라노 도시 빈민 삶의 풍경과 그 정서가 시동생 알도라는 인물을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이어지는 몇 개 장에서 알도를 거듭 다루는데 가벼운 스케치들이 겹치면서 독자는 그의 인생 전반에 대한 윤곽을 점점 선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나는 알도를, 그의 아내와 아들을 아는 사람처럼 알게 되었다. 알도가 아들의 안부를 알리는 편지를 받고 작가는 젊은 알도의 방황을 회상한다. 형제들과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개인적 성격뿐 아니라 사회가 보장하는 성공에 저항하는 알도의 (내가 보기에는 명백히) 계급적 정서가 정말 흥미롭게 서술된다. 아는 사람 같아진 알도에 대해 나는 좀 애틋한 마음을 품는다. 뒤늦게 장가 가 어렵사리 자리를 잡은 이 노동자 계급 남자는 오래 전 죽은 형의 아내인 작가에게, 이탈리아를 떠나 일본에 거주하는 이 머나먼 가족에게 자주 긴 편지로 소식을 전했다고 작가가 쓴 문장 때문이다. 때로 작가가 답장을 하지 않아도 그가 아는 가족들 소식을 꾸준히 편지로 전하고 자기 처가와 훗날 자리잡은 동네에 초대했다는 겉으로 투박해 보이지만 어딘지 다정한 그런 사람이라고 이 책은 기회되는대로 그를 내게 소개했던 것이다.
한편 ‘굴다리 너머’에 이어진 ‘마리아의 결혼’을 나는 매우 진지하게 읽었는데, 여기에서는 도시 빈민보다도 못한, 여전히 소작농 신세에서 멀리 달아나지 못한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농촌 삶의 풍경이 핍진하게 묘사된다. 그 비참한 현실은 마리아라는 인물과 형제들이 이후 몇십 년 간 어떤 삶을 사는지에 대한 간결한 몇 줄 사실의 뒷받침을 받아 이러한 계급에 있던 당시 ‘어떤’ 이탈리아인들의 삶과 사회의 시계열적 변화를 정말이지 훌륭하게 전달한다. 나는 가족의 문제아처럼 살던 마리아가 좋은 남자를 만나 견실하게 인생 중후반부를 그런대로 무사히 살아냈다는 이야기가 좋았다. 그 일이 소설 속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데 크게 위안을 받는다. 에세이가 내게 주는 어떤 감동은 소설의 허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기적이든 우연이든 이 세계에 실재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시동생 알도의 장인어른 이야기를 다룬 ’힘든 산 일을 마친 후처럼‘ 역시 인물과 이탈리아 지역 특성을 훌륭하게 전달하는 에피소드다. 여기서는 아마 깊숙한 알프스 지역일 ‘산촌’이 배경이 된다. 이 고장도 끔찍한 빈곤의 집단적 기억을 갖고 있다. 물론 밀라노나 마리아 가족이 살던 그 근방 농업지역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역에 깊이 연관된 사람들의 공동체적 유대에 기반한 삶의 모습과 특성은 앞에서 이미 알게 된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다른 지역과 대비를 이루며 독자에게 그 개성을 빠르게 각인시켜 나간다.
이렇게 쓰고 보니,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도시 빈민과 농촌 빈민, 고립된 산간 지역의 삶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훌륭한 산문이라는 문장으로 이 글을 새롭게 시작해야만 할 것 같다. 또한 그 지역과 계급적 특성을 온전히 체현하고 있는 구체적인 인물들이 개성적이고 매력적으로 그려진 산문집이라고 말이다.
이 후반부를 완전히 집중해 읽어 내려가던 때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멈추지 않고 울려퍼졌다. 왜 앞에서 언급한 가족사를 반복하지? 물론 한 권의 책으로 의도하지 않고 여러 시기 여러 곳에 발표한 글들을 물리적으로 묶으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편집자라면 각 장 사이의 관계를 좀 더 유기적으로 만들자고 작가에게 강력하게 권고했을 것 같은데 어째서 한 권의 책으로서 완성도 있도록 편집하거나 퇴고하지 않는 걸까? 그 답의 일부는 편집자 회고에 있다고 생각한다. 잡지에 연재했던 느슨한 주제의 글들을 묶은 책이라는 점이 그렇다. 역시. 그러나 후반부 가족사는 거의 다시 썼다는 사실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나는 다소 놀랐다. 그렇다면 여기까지인 것이구나. 이것이 그때 작가가 할 수 있는 전부였구나. 아니면 그마저 작가 의도이거나. 아쉽든 내 마음에 들지 않든 그런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도 위에서 내가 좋게 봤다고 말한 가족과 인물을 중심으로 글을 한번 더 손봤다면 더 훌륭한 한 권의 책이 되었을텐데, 라는 마음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는 어느새 이 작가 글을 좀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면을 포함해 그의 스타일을 어느새 받아들였는지도. 그럴 것이다. 그게 지금 내 가방에 작가의 다른 에세이집 ‘베네치아의 종소리’가 들어있는 이유겠지.
한편 에세이집 구성과 구심력에 대해 갖는 아쉬움은 쓰는 입장에서의 에세이‘집’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결국 한 권으로서 완성도를 가지려면 단편의 묶음이더라도 확실한 기획이 필요하다. 몇 십 개씩 여러 기간에 걸쳐 작성했던 내 글을 돌아보면 그런 일관성과 집중력은 분명 떨어질 것이다. 의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 생각과 관점은 당연히 글에 드러난다. 한 시기, 당시의 생각과 감정을 한 권에 담는 게 지금의 내게는 더 합당해 보인다. 변화한 생각은 다른 책으로 묶이는 게 더 좋다고. 그 기저에는 무엇을 왜 쓰고 싶은지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의도가 독자에 제공할 수 있는 훌륭하고 중요한 편의라는 생각이 아마도 지금 내게 있는 것 같다.
여하간 한번 거래를 텄으니 좀 더 읽어볼 생각이다. ’베네치아의 종소리‘(그리고 사실 집에는 ’밀라노, 안내의 풍경‘도 있다…) 독서 경험은 어떨지 궁금하다. 훌륭한 에세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 준 책,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