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8/14-08/18, 겐트, 브뤼헤, 브뤼셀
10시 25분 밤 비행기를 타면 오전 5시 20분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한다. 마침 암스테르담에는 오전 7시 반에 브뤼셀에 도착하는 연결편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이번 광복절 연휴를 벨기에에서 보낼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렇다. 목요일에 퇴근하고 벨기에에 가는 것이다. 2박 5일 일정으로.
미친 건 사실이지만 계산 상으로는 가능해 보였다. 오전 7시 반에 브뤼셀 공항에 도착해 기차 타고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겐트에. 그렇다. 겐트. 이 여행은 얀 반 에이크에서 비롯되었다. 올봄 루브르에서 봤던 ‘롤랑의 성모’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더 유명한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보다 나는 ‘롤랑의 성모’에 끌렸다. 그의 그림을 더 보고 싶었다. 반 에이크 형제가 그렸다고 알려진 제단화 한 점을 알게 되었다. 겐트에 있다고 했다.
트립티크, 세 폭 제단화이지만 패널은 12개, 닫혔을 때 문 역할을 하는 양쪽 날개를 합하면 총 20개 패널에 그려진 이 거대한 제단화를 볼 필요가 있었다. 맘먹고 가는데 한 번만 보기는 아쉬우니 아침 문 열 때 한 번, 문 닫기 전 한 번, 두 번을 예약한다. 이번 이 도시 방문 목적에 충실한 계획을 세운다.
그러고 보니 북유럽의 베니스라 불리는 운하도시 브뤼헤가 마침 겐트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다. 브뤼헤에는 미켈란젤로의 성모자상이 있다. 미켈란젤로 살아생전 이탈리아 밖으로 나간 거의 유일한 조각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그러고 보니 이 도시에는 한스 멤링도 좀 있다. St.John’s Hospital, 성 요한 병원이라고 번역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12세기부터 교회에서 운영하던 이 기관이 실은 호스피스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고 나의 여행 스승 릭 스티브스 아저씨는 말했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12세기 인간의 의술 수준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치료보다는 죽음 앞에서 위안을 주는 곳이 병원이었을 거라는 정의가. 여하간 이곳에 어쩐 일인지 한스 멤링 그림이 좀 있다는 것이다.
한스 멤링.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보유한 15-6세기 플랑드르 화가 작품 중에는 얀 반 에이크 말고도 사람들을 놀라게 할 작품이 여럿 있다. 플랑드르 르네상스 방을 다 돌고 나면 작가 이름 몇 개쯤 주워 삼기게 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는데 그 목록에는 한스 멤링 Hans Memling, 헤라르트 다비트 Gerard David 같은 이름들이 적히게 마련인 것이다. 그 작가들이 단체로 기거할 법한 미술관도 브뤼헤에는 있었다. 그뢰닝게 미술관. 작은 동네, 작은 미술관이 뭘 얼마나 많이 갖고 있을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심심할 일은 없다.
시간과 에너지가 남으면 소진할 종탑이 도시마다 있다. 무엇보다 중세 일찌감치 무역으로 번성한 두 도시는 옛 번영을 간직한 얼굴, 말 그대로 북유럽 중세의 파사드를 하고 있다고 했다. 피렌체에 남은 중세의 얼굴과는 다를 것이 분명했다. 과거의 영광은 운하 위에서의 보트 투어로 일별 할 수도 있었다. 앤트워프로 상업적 무게 중심이 이동한 15세기 이후 이미 업종 전환한 듯 어엿한 이 관광 도시들은 (내게 오래된 도시들이 그렇듯) 걷고 둘러보는 행위 자체가 어트랙션이 될 것이었다.
일요일 저녁 9시 반, 서울행 비행기를 타러 암스테르담에 가기 전에 브뤼셀을 둘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까지 가는 유로스타는 브뤼셀에서 탈 거니까. 빅토르 위고가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했다는 그랑 플라스도 보고 해가 드는 아름다운 아케이드도 지나 볼 것이다. 마그리트 미술관(그렇다, 이제 알게 되었지만 르네 마그리트는 벨기에인이었던 것이다)과 벨기에 왕립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어쩐 일인지 루브르에는 모작이 있던 자크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진품을 소장한 곳, 그보다, 피터 브뤼헐 Pieter Brueghel (플랑드르 화가들 이름을 말하고 쓸 때마다 괴롭다. 낯선 네덜란드어가 그나마 아는 영어와 사정없이 뒤섞인 내 인터내셔널 혼종 표기를 할배들이 부디 용서하길 바랄 뿐이다)을 소장한 곳이다. 나는 관심이 전혀 없지만 루벤스도 있을 것이다. 와플과 감자튀김과 초콜릿을 좀 먹으면서 그저 둘러보는 것이다. 어쩌면 홍합탕을 먹을지도 모를 일이다.
밤까지 깨어있지는 못해도 일찍 일어날 수는 있다. 지난 런던 여행과 작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검증된 방법이다. 주로 저녁에 있는 연주회에는 그러므로 애초에 포기한 기획이었지만 아침부터 걷고 보는 관광은 할 수 있다. 오전 일곱 시에 일어나 저녁 일곱 시에 자는 시차 적응할 새 없는 여행을 한다. 연착과 우연은 감내한다. 그냥 한 번 해보는 거다. 따지고 보면 거창할 일도 아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생각처럼 될지, 생각처럼 좋을지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될지.
그렇게 출발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