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치아노,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내셔널 갤러리, 런던
그림은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웠다. 세인스버리 윙에서 이어진 본관에 들어서면 갑자기 거대한 방이 나타나는데 베로네제 크기에 딱 어울리는 공간이다. 초행길, 갑자기 나타난 탁 트인 공간에 당황해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란 듯이 이 그림이 나타난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는 그 자체로 티치아노 방을 알리는 거대한 표지판이 된다.
그림이 눈에 띄는 게 위치와 제법 큰 그림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선명한 파란색. 좌상단 파란 하늘은 완전히 내 눈을 사로잡았다. 보는 둥 마는 둥 큰 의미 없이 베로네제 방을 의무감으로 빠르게 한 바퀴 휘돌아(여기도 유명하고 훌륭한 작품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린 듯이 티치아노의 파란색 앞으로 걸어갔다.
지금까지 모든 시기 회화를 통틀어 이렇게 유의미한 파란색을 본 적이 있던가. 아닌 것 같았다. 그간 수도 없이 봤을 게 분명한, 너무 값 비싸서 성모에게나 쓸 수 있던 청금석 같은 것들이 마치 본 적도 없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색과 형태 중 색을 끝까지 밀고 나간 작가 중 하나인 마크 로스코도 분명 캔버스 가득 파랑을 쓰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파랑 아니라 다른 단색을 다 꼽아봐도 그렇다. 로스코와 달리 형태를 끝까지 밀고 나갔던 칸딘스키에서 오히려 단순해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색들이 있지만 거기서 이렇게 강렬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칸딘스키는 내게 시각적 쾌불쾌보다는 개념의 범주에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색의 화가들에 집중해 본다. 아, IKB는 어떤가? 이브 클랑이 상표 등록까지 했다는 인터내셔널 클랑 블루, 그 짙으면서도 선명한 파란색 그 자체. 이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조금 놀랐는데 그 파란 캔버스에 내가 붙인 레이블은 ‘개념 미술로서의 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환기는 어떤가? 음, 타당하다. 직관과 감각, 그 순간에 필적하는 사례는 오랜 검토 끝에야 겨우 떠오른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의 파란색이 단독으로 돋보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아래 등을 보이며 몸을 틀고 있는 여자의 파란 옷과 거기 둘러진 빨간 옷자락, 그녀를 향하는 역동적인 자세의 바쿠스가 두른 역시 붉은 계열의 직물이 동조한 효과에 가까울 것이다. 무엇보다 하늘의 구름과 왕관자리의 흰색. 이들과 조합된 파랑의 효과가 내게는 밤이 아닌 밝아오는 새벽을 연상시켰다는 게 흥미롭다. 밤이라기엔 너무 빛나는 파란색이었다. 모든 게 선명해지는 파란색.
다음 날 다시 그림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야 나는 구름과 하늘이 양감 없이 납작하게 그려져 있음을 발견했다.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얇아 보이는 평면적인 하늘과 구름이었다. 달리 보면, 그림의 다른 부분과 비교하면 마무리를 덜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차이다. 그러나 더 글래머러스한 하늘을 연출했다면 내가 느낀 강렬함은 어쩐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한편 이 그림은 티치아노와 푸생 사이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 연관성은, 있다면, 일방향이 명백하다. 푸생이 그린 신화 소재의 작품들, 판과 사티로스, 바쿠스들이 등장하는 흥청망청 그림들은 그가 티치아노에게 받은 영향을 드러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많은 구성요소들, 즉 등장인물들의 배치도 그렇다. 물론 이 작품 속 바쿠스 무리의 움직임은 푸생의 인물들에 비해 훨씬 역동적이다. 또한 푸생에게는 특유의 테라코타 톤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그만의 특성이 있고 그것은 이다지도 화사한 티치아노의 그림에서는 잘 감지되지 않는 면이다. 종교화에서마저도 느껴지는 티치아노의 세속적인, 너무도 육감적이어서 욕망이 흘러넘치고마는 특징은 그만의 독특한 점이므로. 그러나 이 그림의 작은 사티로스에서 나는 어린 바쿠스를 먹이는 푸생 그림을 끝없이 연상하게 된다. 티치아노가 푸생에게 실제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 같은 것은 미술사학자들이나 확인하면 될 일이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비교할 레퍼런스들이 늘어가는 기쁨, 연상과 관계(그것이 나만의 것이라 하더라도,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를 만들어가는 즐거움을 잠시 만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