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멤링, 성요한 병원, 브뤼헤
브뤼헤의 성요한 병원 St. John‘s Hospital 은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최고의 공간이다. 브뤼헤 북쪽에서 역 방향으로 성모성당을 오른쪽에 끼고 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이 도시에 즐비한 화려한 중세 고딕 건물들 사이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파사드가 나타난다. 안내판이 없었다면 나는 이곳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화려한 느낌이 전혀 없는, 그러나 어딘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어두운 좁은 입구를 통과하면 갑작스럽게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조용하고 내밀한 안뜰. 낮은 벽돌 건물이 자연스럽게 만든 도시와의 경계 안쪽은 바깥의 분주함 대부분이 걸러진 것처럼 차분했다. 10미터도 안 될 건물 벽면만큼의 입구를 걸어 들어왔을 뿐인데 이다지도 비밀스러운 장소라니. 기대와 활기, 경계심으로 내내 긴장감이 높은 여행 기간 중 이런 공간을 만나면 나는 도리 없이 사랑에 빠진다. 구글맵에서 이곳은 다만 한스 멤링이 전시된 장소이자 위치일 뿐이었는데. 핀 아래 점은 그렇게 순식간에 특별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과정과 도구, 위도 경도를 표시한 숫자를 넘어 그 자체로 목적과 의미가 된다. 나만의 여행지가 된다.
9과 3/4 승강장이라도 통과한 것처럼 잠시 어리둥절한 채 공간의 분위기를 흡수한다. 충분하지는 않았다. 내 평소 여행 패턴에 비하면 시간이 촉박한 여행이므로(다음 일정으로 최소한 그뢰닝엔 미술관은 소화하기로 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서둘러 목적지를 향하도록 스스로를 재촉했다. 작은 화단에서 어렵게 시선을 거뒀다. 성모성당 쪽을 등지고 섰을 때 보이는 건물이 목적지다.
용무는 한스 멤링 Hans Memling. 브뤼헤 출신의 15세기 화가는 이 병원(이라고 불리던 사실상의 호스피스)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환자들을 위무하기 위한 그림을 그렸고 그들은 오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에 있다. 한스 멤링은 전시 동선을 따라 가장 안쪽 유리온실 같은 별도 전시공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이 있는 세폭 제단화가 주인공 자리에 모셔져 있다. 가운데 패널은 두 성인을 양측에 둔 성모자가 중심을 이룬다. 성모의 붉은 로브만큼이나 성녀 카타리나(무릎 아래 바퀴를 둔 걸로 봐서 아마도 그럴 것이다) 치마폭의 문양이 화려하다. 역시 직물로 흥한 지역 화가다운 묘사라고 생각하며 한참 들여다본다.
얀 반 에이크 생애 후반기 즈음 태어난 이 화가에게서도 매우 세밀하고 섬세한 묘사, 선명한 색상과 아름다운 직물 표현을 이 지역 화가들의 공통점처럼 찾아낸다. 동시에 얀 반 에이크와 비교하면 해상도가 낮은 건물과 배경에서 차이를 찾아내고 무엇보다 한스 멤링 특유의 성모 이미지를 강화하게 된다. 성모 이미지는 화가를 구분하기 좋은 특징이 된다. 당연하기도 하지만 얀 반 에이크와 한스 멤링, 헤라르트 다비드의 성모는 다르게 생겼다. 벨리니나 라파엘로, 시모네 마르티니의 성모와 다른 얼굴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림별로도 같은 얼굴은 드물지만 성모의 얼굴은 화가별 스타일과 개성을 도드라지게 반영한다.
반짝이는 곱슬이 풍성하고 생기 있게 아름다운 얀 반 에이크 성모들에 비하면 한스 멤링의 성모들은 헬쓱하고 건조하고 초연하다. 그간 본 그의 성모 중 가장 아이코닉한 성모의 얼굴을 나는 이곳에서 찾았다. 사과를 들고 있는 성모는 대작인 세폭 제단화와 다른 의미로 이 작은 미술관의 대표 이미지로 소구력이 있어보인다. 나는 이 성모(자) 엽서를 기념품으로 가져왔다.
한스 멤링의 점잖은 성모들은 어떤 여성들의 얼굴을 재현했을까? 생각하며 지나가는 지역 주민(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때때로 유심히 바라봤다. 서로 다른 매력으로 재현된 초월적 인물의 구체적인 이미지는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가 된다. 구체성이 구현하는 고도의 추상성 혹은 고도의 추상성에 이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론으로서의 구체성은 예술계에 새로운 사실도 숨겨진 비밀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고전적이고 입증된 방법에 가까워 보인다.
세폭 제단화 양 날개 패널은 각각 주요 등장인물인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을 주인공으로 하는데, 목이 잘려 죽는 순간의 세례자 요한보다는 사도 요한 쪽이 흥미롭다. 초점 없이 먼 곳을 응시하는 그는 사실 최후의 심판을 생각한다. 사도 요한의 비전은 주제에 대한 작가의 해석과 상상력의 가장 순수한 시각적 재현처럼 보인다. 내가 늘 무서워하는 이 무지개빛 이미지(불구덩이에 빠지고 오거에게 먹혀 하반신만 남은 인간 형상으로 표현됭 최후의 심판 같은 것은 오히려 순진할 정도로 직접적이라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다)는 그런 의미에서 릭 스티브스 아저씨 말마따나 초현실적이다. 하기야, 실현된 바를 본 인간이 없으니 이 주제에 대해서라면 초현실성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 같기도 하다. 다음에 방문하면 나는 아마 이 패널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작품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세례자 요한과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는 세폭 제단화, 사과를 들고 있는 성모와 아주 비슷한 성모자를 아마 봤을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분명히 잘못된 기억도 있다. 얀 반 에이크 근처에 (손바닥 만한) 남녀 초상화 각각이 있는데 두 점 모두 한스 멤링 작품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 초상화처럼 뿔달린 머리장식을 하고 베일을 쓴 여성의 초상은 그러나 로히어르 반 데르 바이덴 워크샵 작품으로 추정된다. 로베르 캉팽을 포함한 이 북유럽 화가 무리는 아직 내 머릿속에서 서로의 영역을 자주 침범한다.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서 본격적으로 더치 화가들을 보고 나면 내 머릿속의 이들도 독립된 구역에서 각자 평안할 수 있지 않을까?
그와 별개로 아래 초상화의 목걸이 장식을 한참 바라보았다. 회색빛 진주가 영롱하고 목걸이 줄의 금속성이 차갑게 느껴져서다. 물건들은 얼마나 확실한지. 이 초상화 뿐 아니라 어디서라도 인물을 장식한 장신구의 사실성과 실재성은 언제나 인물의 얼굴보다 더 확실히 그 실존을 뽐낸다. 인간에 비하면 금속과 장신구의 물리적 수명이 높은 확률로 길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 같기도 하다.
성녀 우르슬라의 일대기는 건물 모양을 한 일종의 조각 사면에 그려진 작품이다. 베네치아 아카데미아에는 카르파초의 우르슬라 연작이 있는데, 두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복원 중이라 볼 수 없었다. 이야기와 이미지가 인상적이어서 같은 모티브의 작품에는 일단 관심을 갖게 된다. 다음 베네치아에 갔을 땐 복원되어 씽씽한 우르슬라를 볼 기대도 품는다.
그러니까 이 작품들은 모두 전시 동선 마지막에 위치해 있고 나도 이 미술관 방문 마지막 순서로 관람한 것이다. 앞쪽에는 병원의 역사와 당시 의학적 처치에 등에 관한 볼만한 전시들이 있는데, 초입에서 정말 놀라운 작품을 만났다. 예기치 못한 놀라움이었다.
전시 진행 방향에서 이 작품을 처음 보면 돼지의 오른쪽 옆모습, 그러니까 얼굴을 돌린 뒷모습이 보인다. 이때 작품은, 인간 여성이 죽음에 이른 돼지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주는 형상으로 보였다. 그렇게 인식하니 인간 뿐 아니라 동물도 죽음 앞에서 존엄할 권리가 있는가? 라는 질문 자체, 혹은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읽혔다. 그런데 돼지 발치에서 흥미로운 디테일을 발견했다. 돼지다운 발굽 뒤에 인간 손가락이 붙어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돼지 다리는 인간 여자 다리와 허벅지 같기도 했다. 음? 죽어가는 인간, 깊게 병든 인간을 돼지로 은유한 것인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21세기에도 병든 인간의 육체적 고통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병든 인간은 고립되고 이해받지 못하기도 하니까. 한번 더 각도를 바꿔 얼굴을 바라보자 더 기이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인간이 되어가는 돼지인가? 돼지가 되어가는 인간인가? 맙소사. 인간과 돼지의 경계는 모호한가? 나는… 뭐지?
돼지 인간이 던지는 충격으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고 다시 보면 이 작품이 전하는 확실한 의미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돼지든 인간이든 죽음은 막을 수 없어도 우리의 죽음은 더 존중받고 더 위로받을 수 있을거야, 라고 그의 몸을 받치고 있는 인간이 역설하고 있으므로.
성 요한 병원은 단순히 한스 멤링 미술관으로 정의할 수 없는 곳이었다. 현대 의학의 짧고 불완전한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철학적인 전시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무 골격이 천장과 기둥에 드러난 이 늙은 건물 안을 거니는 일이 내게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오래된 공간 안에 속하는 순간 나는 언제나 조금 황홀해진다.
12세기 병원 설립 이래 간호사 역할을 하던 수녀들이 병원의 상징 혹은 표식으로 만들었다는 작은 소품들, 금속이거나 때로는 천 위에 실로 수놓은 물건들을 바라본다. 유명 작가의 작품도 아닌 이 오래된 사소한 물건들을 바라볼 때 그러나 나는 깊이 감동 받는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지만 생각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