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문학동네, 2017
뭔가 잘못됐다. 이토록 제대로 된 문장이라니. 얼마 전 ‘트리에스테의 언덕길(뮤진트리, 2025)’을 읽은 후 나는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미덕이 있는 책이지만, 문장 구조가 불완전해서 읽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정상적이고 가독성 높은 문장뿐이라니. 번역 문제일까? 그러나 역자가 같으므로 가능성이 낮다. 그새 내가 작가에게 익숙해진 걸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선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잘못된 건 읽을 당시의 나였을지도 모르니까.
에세이스트로서 저자의 명성은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내게도 동의를 얻는다. 잘 쓴 에세이들이다. 정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은 매 챕터 명확한 주제와 분위기에 봉사한다. 그 구심점은 한 인물이다.
이 일반적이고 당연한 사실 위에 나를 특별히 사로잡은 요소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작가가 그 당시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경험들의 고유함이다. 재현의 불가능성. 그 때문에 성립하는 (모든) 사건의 개별성과 특수성. 시간의 불가역성에 기인하는 이 오래된 진리는 20세기 초중반, 내가 경험한 적 없는 가까운 과거를 배경으로 한 이 책을 통해 자신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60년대 파리 유학생이던 작가가 클라라 하스킬의 모차르트를 콘서트 현장에서 보고 들었다는 것이다. 맙소사. 출근 버스에서 읽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스가 아쓰코 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페이지를 자신이 직접 경험한 콘서트 서술로 채우는데 여기에는 모스크바의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다는 에밀 길헬스 콘서트도 포함된다. 모든 performance 즉, 공연/수행의 보편적 특성이기도 하지만, 죽은 천재들의 콘서트라니. 두 번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다. 게다가 클라라 하스킬의 모차르트라니. 그 무심함에서 나오는 끝간 데 모르는 쿨함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나로서는 실연을 경험한 작가를 부러워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부러움이 내 벌어진 입으로 소리 대신 한참 새어 나왔다. 그 장소에 직접 있었다는 한 줄의 경험만으로도 작가는 나를 사로잡았다. 문자 그대로 나를 산채로 잡았다. 나는 도리 없이 생포되어 그 페이지에 한참 머물렀다.
죽어가는 아버지가 부탁한 기념품을 구하기 위해 밀라노 역에 정차한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를 찾아가는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귀족적인 혹은 부르주아적인 부를 풍기는 구대륙의 고전 냄새를 짧은 글에서 나는 놓치지 못했다(파리에서 오리엔트 익스프레스가 다시 운행된다는 말이 있던데, 다음에는 이 기차도 타볼 생각이다).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향수가 어떻게 가능한지 내게는 여전히 불가해한 감정이다. 동시에, 어떤 경험은 저자가 아버지로부터 간접 경험한 것들을 통해, 그러니까 1차 대전 이전의 여행과 중첩되어 더 풍부해진다. 비행기가 아닌 배와 기차로 여행하던 시기의 호화로움들. 역시 내 것이 아닌 것이 기이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이 책은 중심인물을 둘러싼 시공간을 더할 수 없이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압화처럼. 더구나 이 관찰자의 특수성 때문에 관찰 결과는 더욱 특별해진다. 십 대에 2차 대전을 경험한 동양 여성이 종전 후 변화를 겪고 있던 유럽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 독특한 렌즈로 말미암아 책의 모든 문장은 특별할 뿐 아니라 희귀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프랑스 기숙사 원장과 개인주의에 대한 완전히 다른 시각을 나누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구체적인 사건은 모르지만 당시 주류 가톨릭계에서 배척받던 진보적인 신부의 설교를 듣기 위해 파리에서 사르트르까지 밤새 걷는 대학생 대열에 합류했던 일화도 마찬가지이다. 혼란과 흥분. 저자보다 그 사건에서 더 거리를 두고 있는 내게도 그것은 전달되고 있었다.
이 책이 나를 사로잡은 두 번째 요소는 당연히 이탈리아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책 속에서 의식적으로 찾고 있었다. 자기가 원래 속한 곳에서 미끄러져 다른 어딘가를 찾던 한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길을 가는지에 대한 사례를. 저자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쩐지 자신이 거기 속해있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나처럼. 그리고, 그래서 다른 어딘가를 시험하고 또 시험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프랑스였고 아마도 이탈리아에서 바로 여기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 이유를 조금이라도 발견하고 싶었다. 우리는 왜 ‘여기’에서 만족할 수 없는지. 그리고 저기에도. 빌 브라이슨 책 제목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Neither Here Nor There. 그렇더라도, 알고 싶었다. 스가 아쓰코 씨에게는 왜 일본도 프랑스도 아니었는지. 또 왜 이탈리아라고 판단했을지. 그건 결국 나의 이유를 알아내야 하는 나의 개인적인 프로젝트라는 걸 알면서도 남의 답안지를 보고 싶었다. 힌트라도 얻고 싶었다. 왜 우리는 이탈리아라고 생각하는지. 우리가 아니라 그녀라고 해야겠지만. 여기에 대한 답은 못 찾았다. 그게 저자나 책의 부덕은 당연히 아니다. 물론 나는 저자의 다음 에세이집을 다 읽으며 혹시 다른 단서들이 산재해있지 않은지 연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