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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7. 2021

44주. 셉템버 이슈(2009)

2020. 05. 16. by 만정

안나 윈투어. 미국 보그 편집장. 세계 패션계를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프라다를 입는 악마로  명성-혹은 악명- 한국의 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바로 그녀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내가 반복 시청하는 영화  하나였다.  릿을 소비한다는 생각 때문에 길티 플레저였지만 뉴욕의 화려한 패션계  신비한 악마를 엿보고 싶은 욕구가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 그녀가 완전히 대상화된  소설/영화 이후에, 안나 윈투어를 주체로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된다.  영화가 바로 오늘의 영화, ‘셉템버 이슈이다.


‘셉템버 이슈’는 말 그대로 9월호로서, 2007년 보그 9월호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주된 서사이다. 9월호가 특별한 것은, 9월이란 패션계의 1월과도 같아서, 다음 해의 패션 유행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분량 역시 특별해서 매년 얼마나 두껍고 무겁게 발행될지 관심을 끈다. 이렇게 크나큰 연중의 행사를 진두지휘하는 것은 역시 편집장이다. 당연히 영화는 보그의 최종 책임자, 보그라는 교회의 “교황”인 안나 윈투어를 중심으로 시작된다.


영화의 첫 주제 중 하나는 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여성 리더에 대한 세간의 평가이다. 보그의 발행인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반론-또는 변론-한다.


“안나는 바쁜 비즈니스 여성이에요. 그녀가 따뜻하거나 친절하지는 않죠. 하지만 그녀는 그저 일을 할 뿐입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을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싶어 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제목이 전달하는 가장 명시적인 가정이자 주장이 안나 윈투어가 악마라는 것이지 않은가. 물론 비유일뿐더러, 그녀를 근거리에서 겪은 작가가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으나, 나는 발행인의 말에 완전히 공감했다. 우리는 좀처럼 성공한 남자 리더들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따뜻하고 친절한 대신 부하직원들을 열심히 다그쳐 목표를 달성하는 그들을 칭찬한다. 냉철하고 추진력과 카리스마, 리더십이 있다고. 일을 완벽하게 하면서 친절하고 따뜻하기까지 한 비즈니스맨이 이상적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다만, 동일한 자질을 성별에 따라 상반되게 평가하는 데 이골이 난다. 회사생활 십 년 차 여성으로서 영화를 다시 보자니, 이 점이 전에 없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흥미롭게도, 안나 윈투어를 중심으로 원톱 영화가 될 것만 같던 영화가 어느 시점엔가 또 다른 주연, 혹은 주연급 조연을 등장시킨다. 그레이스는 영국 보그에서 십 대부터 모델로 활동하다 교통사고로 얼굴에 큰 부상을 입은 후, 패션 에디터로서 경력을 시작한 인물이다. 안나 윈투어와 같은 날 미국 보그에서 일하기 시작해 함께 한 지가 20년이라는 그레이스는 업계에서 전설적인 스타일리스트로 통한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그해 9월호에 실린 그레이스의 결과물들은 패션과 스타일을 전혀 모르는 내가 봐도 감탄스럽다.


그레이스의 비중이 영화 속에서 (서서히) 높아진 이유는 감독이 촬영 과정에서 (아마도 예기치 않게) 그녀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레이스는 개인사가 극적인 데다 결과적으로 9월호에 실린 그녀의 작업물 비중이 높아 셉템버 이슈의 은밀한 위너가 된다. 무엇보다, 자신과 함께 일하는 모델, 동료들 그리고 본인을 대하는 따뜻하고 배려 깊은 성격에 감독 자신이 설득당했다는 느낌이다. 안나의 제국에서 그녀에게 맞짱 뜨는 거의 유일한 인물로서 통쾌함을 선사하는 것도 사실이다. 두 사람의 상반된 ‘캐릭터’는 회사 내 역할과 입지 같은 요소의 영향을 받았을지 모른다. 따뜻함을 제공할 수 있는 역할도 회사에는 존재하니까. 어쨌든 그레이스라는 인물은 미묘한 트위스트와 대립을 만들어내고, 이 영화가-뿐만 아니라 보그가(!)- 안나만의 잡지라는 데 은근한 반론을 제기한다. 나 역시 그레이스의 성품에 설득당했다. 또한 안나보다는 그레이스를 통해, 백 명의 유능한 사람에게는 백 가지 다른 유능함이 있을 수 있음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동시에 나는 어떤 회사원인지, 어떤 회사원이 되고 싶은지 잠시나마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한편, 모든 프로젝트의 운명이 그러하듯 9월호 발간에도 이슈가 터진다. 마감을 코앞에 두고 재촬영이 필요한 꼭지가 생기고, 로마에서 촬영해 온 사진은 도저히 커버로 쓸 수 없을 지경이다. 보스 또는 경험 많은 상사의 진가는 이때 발휘된다. 망한 커버가 도착하자, 심각함을 대번에 알아챈 안나는 직접 나선다. 직접 사진작가에게 전화해서 다른 사진은 없는지 체크하고 그 가능성마저 사라졌을 때, 가진 걸로 어떻게든 수습하도록 결정하고 지시하는 것이다. 영화의 편집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실제로 그렇게 처리했으리라 짐작한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회사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사고 수습. 사고는 언제나 생기게 마련이고 수습할 계획이 필요하다. 경험 많은 보스들이 최선의 계획을 신속하게 세우면 수습에 돌입한다. 재촬영은 그레이스가 해결한다. 아무 준비 없이 이틀 만에 내놓은 결과물에 모두가 감탄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결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상황에서 기시감을 느끼고 놀란다. 수습해내면 그것으로 문제없는 것이 되는 퀘스트 같은 회사의 문제(=일)들. 당연한데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 교훈을 나는 다시 한번 곱씹는다.


패션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뒤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앞을 보고 나아가는 것.


이 호쾌한 비즈니스 액션 활극은 10월호를 준비하는 회의로 끝난다. 어디 패션뿐이겠는가. 요즘 내 옆자리의 50대 중반 책임님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을 다만 안나도 그레이스도 말할 뿐이다. 마치 비즈니스 원칙을 입을 모아 말하듯이. 아직은 숨 고를 시간이 좀 더 필요하지만 나 역시 스스로에게도 곧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자, 만정 씨,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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