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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7. 2021

43주. 이웃집 토토로(1988)

2020. 05. 03. by 만정

3주 전 일요일인지 토요일 아침이었는데, 갑자기 토토로를 보고 싶은 욕구에 휩싸였다. 비척비척 일어나 아침도 챙기지 않고-나는 주말조차 아침식사를 거르는 일이 거의 없다-노트북을 열어 토토로를 찾았다. 목이 마른 사슴 또는 낙타처럼 우호적인 괴생명체를 보기 위해 허겁지겁 손가락을 움직였다. 토토로를 보고 싶은 이유는 분명했다. 회사일로 거칠어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부드럽고 촉촉하게 달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과음한 다음날 돈가스나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기대하는 것처럼, 나는 토토로가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불안한 내 마음을 잠시나마 포근하게 어루만져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반세기 전 일본 시골마을의 자연 풍경과 풍채 좋은 털복숭이가 귀여운 몸동작을 하고 아이들에게 일말의 호의를 베푸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저 유명한 토토로 노래를 들으면서 회사니 IT니 컴퓨터니 하는 것들은 잠시나마 마음속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토토로와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월드는 내가 막 중학생이 되던 때쯤, 그리고 일본 문화가 합법적으로 국내 시장에 유통되기 직전 즈음 처음 만났을 것이다. 아마 '반딧불의 묘'나 '원령공주'를 먼저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저 유명한 토토로를 좋아했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토토로를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기괴하면서도 안기고 싶은 외모라니. 메이도 첫 만남에서 이미 토토로의 풍만한 배 위에서 편안히 잠들지 않았던가(여담이지만 나는 남자친구의 옛날 모습에서 심심찮게 토토로를 떠올리곤 했다. 지금은 너무 날씬해져서 기억에만 남아있지만). 토토로가 고양이 버스에 오르는 장면은 기괴함이 귀여움, 호감과 양립 가능함을 증명하는 위대한 대목이다. 이런 토토로가 희대의 캐릭터임을 부정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있을 것인가.


실제로 나는 토토로를 다시 보는 동안 별생각 없이 웃고 놀라며 아이처럼 감탄했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걱정과 두려움도 내게 범접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한 것은 실제로 이 이야기에는 아이들의 걱정과 두려움이 상존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특히 두 자매 중 언니인 사츠키가 씩씩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배경에는 와병 중인 엄마가 있다. 엄마는 아파서 인근 병원에 입원 중이며, 병이 가볍지만은 않을지 모른다는 것-적어도 아이들의 걱정 속에서는 그렇다-, 또 엄마의 부재가 짧지 않았다는 것이 밝고 명랑해 보이기만 하는 극 아래에 은근히 암시되며 밝고 명랑한 전체 분위기에도 약간의 그늘을 드리운다. 사츠키는 나이답지 않게 동생과 아빠를 살뜰히 챙겨내는 기특한 아이이지만, 엄마의 병세가 나빠졌을지 모른다는 생각 앞에 와앙 울며 또래 아이처럼 무너진다.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이상의 공포가 아이들에게 있던가. 적어도 내게는 최고의 공포였다.


나는 어딘지 털어놓을 수 없는 걱정과 두려움이 많았던 아이로 스스로를 기억한다. 겉으로도 속으로도 사츠키처럼 야무지고 씩씩한 구석이라곤 없었다고 한다면 조금은 지나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정도로 그늘지고 서늘한 구석이 언제나 마음 한켠을 차지하고 사라지지 않았다. ‘쓸데없는’ 걱정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덜 심각하거나 덜 영향력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이 걱정 없고 좋았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여기엔 지나침이 없다. 그 말을 지금의 괴로움을 피해 달아나는 어른들의 우스운 도피처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와 딸린 식구들의 생계를 해결하는 과정의 괴로움에 대한 토로 정도로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어쩌면, 정말로, 티 없이 밝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정도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내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의 관대함이다.


어린 시절의 나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던 걱정과 불안은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자연히 잊혔다. 마치 어린애들에게만 붙어 다닐 수 있는 걱정 귀신같은 게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조금도 없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라면 매일같이 마포구의 학교와 신림동의 학사를 오고 가던 때이다. 그때도 나는 나만 아는 괴로움에서 허덕였고, 외롭기도 했고, 곧 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막연한 중압감에 쓸데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도서관에서 D관과 X관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에는 꽃이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있었는지 모른다. 매혹적인 이야기도 잔뜩 들을 수 있었고, 노래도 많이 불렀다. 재미있고 나를 이해해주는 친구를 만나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다 그 시공간의 은혜였다. 포박된 수인처럼 숨이 막히는 순간에도 나를 찾아왔던 이 행운만큼은 결코 평가절하하거나 잊지 않는다.


사츠키와 메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토토로와 고양이 버스를 잊지 않았을까?  꿈이나 환상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간직하고 있었다면 언제고 마음의 결이 거칠어질 때 꺼내어 빗질을 했겠지. 그러면 마음이 비단결처럼 정리되었겠지. 내 일도 아닌데 보고 있자면 나도 그렇게 되니까. 돌아서면 금세 현실의 걱정-역시 태반은 쓸데없다-이 나를 덮쳐오지만, 그 순간만큼은 확실한 위안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멋지지 않은가. 한 사람의 기억을 그린 허구의 애니메이션이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되어 그를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역시, 예술은 여러모로 위대하다. 다시 일요일. 영화마저 말라버린 나의 일요일에 토토로의 가호가 함께하길. 당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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