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사랑하는 마음

프롤로그

by 만정

사람들이 모두 같은 것을 보고 듣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감상(또는 인지)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설명할 생각은 없다. 몇 개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 집에는 가로 세로 60 센티 크기의 노란 패브릭 액자가 있다. 거기에는 멋진 옷차림을 한 여성 11명이 한 줄로 서있고, 그 줄은 네 번 반복된다. 나는 이 그림을 본 아빠가 “왜 여기엔 같은 옷을 입은 여자들만 있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내 눈에는 4명의 같은 여성들이 아니라 11명의 다른 여성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을 얼마나 다르게 보는지 일깨우는 유명인사의 예도 있다. 이미 상업적으로도 대성한 클림트는 젊은 에곤 쉴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아, 나도 자네가 보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좋겠네!"(이 말은 다른 의미로도 흥미로운데, 클림트도, 에곤 쉴레도 자기가 '보는 대로' 그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림으로 짐작컨대, 그들이 본 세계를 나는 죽을 때까지 '볼' 수 없을 것 같다). 청각적인 예도 있다. 어느 날, 바흐에 대한 내 열성적인 글을 읽었을 감자(그녀의 정체는 브런치북 '일요일엔 영화를'에서 확인하시길)는, 자신이 가르치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바흐 칸타타를 들려주고 그 느낌을 쓰도록 했다. 놀라운 건지 당연한 건지, 네 학생은 서로 다른 감상을 내놓았다.


빗방울이 오는 나라 같다

눈물이 있는 어둠 세계

자유로운 사람들

평화로운 아침 숲 속


바흐-에곤 페트리의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네 명의 꼬마 감상자들이 이 곡의 어떤 부분을 인상 깊게 들었는지 알아챌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추측할 수 있었다. 물론 완전한 오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예술과 관련된 어떠한 전문가도 아니다. 우선,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을 실천하지 않으며, 예술작품 생산자가 아니다. 둘째, 나는 예술 이론에 관한 자격증(이를테면 학위) 보유자가 아니다. 하물며 학교에서 미술사, 음악사 수업도 못 들었다. 나는 다만 예술 애호가이다. 성장과정과 유전자 조합의 우연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예술(그것도 극히 협소한 장르와 분야에 국한된)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선호, 욕구를 느끼는 일반인인 것이다. 그 관심과 욕구는 동네 피아노 학원이나 중학교 오케스트라 제2 바이올린의 마지막 좌석, 일요일 오전 첼로 학원에서 간헐적으로 분출하곤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런 내가 클래식에 대한 글을 쓴다면?


존 엘리엇 가디너는 사료에서 건져 올린 역사적 사실(무려 케임브리지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과 합창 지휘자로서의 경험에 기반해 바흐 전기를 썼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는 연주자로서의 삶과 소회를 짧지만 아름다운 에세이로 써냈다. 그러나 나는 음악가도 예술가도 아니다. 그러니 내 글에서 음악/예술가의 시각, 지식, 경험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음악/예술이론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음악가의 생애나 클래식에 대한 단편적이고 뻔한 정보들을 반복할 생각도 없다. 그런 책/글은 이미 너무 많다.


"예술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죠?"

-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8)'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감상의 주체가 대상/예술품을 얼마나 다양하게 인지/경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렵지도, 새롭지도 않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의 예술품을 두고 무수한 감상을 생산해낼 수 있다. 같은 사람이라도 건강, 나이, 날씨 등의 변수에 따라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 그러니 감상은 최소한 감상 경험의 수만큼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술작품이라는 물리/객관적인 사실은 감상(자와 감상행위)을 통해서만 인지/경험되기 때문이다. 시리 허스트베트의 훌륭한 주장처럼, 감상자의 반응과 느낌이라는 영역은 학술적인 이론이나 전문지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상문'은 권위 있는 지식 앞에서 비전문적이고 주관적인 것 혹은 무지에 대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어 왔다. 그 증거가 바로 이 기나긴 서문이다. 나 스스로에 대한 이렇게 긴 설득이 필요할 만큼 나는 지식과 이론의 권위 앞에 위축되어 있었고, 예술에 대한 감상문을 쓸 정당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만을 다룰 것이다. 유명하든 하지 않든, 예술사적 의미가 있든 없든 여기서는 중요치 않다. 나는 내게 조응한, 그러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에게 의미가 생겨버린 예술/대상에 대해서만 쓸 것이다. 그리고 밝힐 것이다. 그들이 내게 조응한 이유를. 가능한 솔직하고 명백하게. 내게 그들이 어떤 아름다움으로, 경이로움으로, 놀라움으로 어떻게 다가온 것인지 있는 힘껏 분석해낼 것이다. 이것은 나의 신앙고백이며 간증이다. 내 내면적 진실, 그 주관성에 대한 사실적 서술과 분석적 설명은 그들에게 바치는 내 열렬한 사랑고백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균형 잡힌 시각도, 객관성도 담보하지 않는다. 기계적 균형을 위해 단점, 아쉬운 점, 한계를 굳이 서술하지 않는다.


한편, 이 감상기는 필연적으로, 감상의 대상뿐 아니라 감상의 주체, 즉 나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것이다. 나라는 감상자 혹은 인식 필터를 드러내지 않고 말하는 감상은 가짜-객관 행세를 하게 되거나, 그럼으로써 객관성의 권위라는 부당이득을 취할 위험이 있다. 마르크스 이래로(어쩌면 '성직자 = 신'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 납득한 이래로) “누가 말하는가”를 밝히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직하고 지적으로 겸손하며 인간적으로 용감한 일일지 모른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 사랑고백을 읽은 이에게 잊고 있던 사랑과 재회하는 기쁨 혹은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선사하는 것이다. 내 사랑과 그 이유는 거의 열광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어쩌면 그 환하고 따뜻한 불길에 이끌린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소개할 수 있을지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나의 흥분과 열정이 전염성을 가져(이 말을 이토록 실감하는 세계에서 비유적으로 사용 가능할지 확신이 들지는 않는다) 최소한 그 입구까지는 단 한 명이라도 안내할 가능성이 있을지 말이다.


자, 그럼 준비는 끝났다. 모두에게 흥미로운 여행이 되길 기원한다.



음악이 궁금하다면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 유튜브에서 듣기

영화가 궁금하다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 영화 이야기 읽기

'감자'가 궁금하다면

브런치북 '일요일엔 영화를' 바로가기

참고문헌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오픈하우스, 2020

알렉상드르 타로,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풍월당, 2019

시리 허스트베트, <사각형의 신비>, 뮤진트리, 2012

마틴 게이퍼드, <예술과 풍경> , 을유문화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