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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Apr 09. 2021

#02 불완전한 존재를 향한 연민의 시선

바흐 - 시온은 파수꾼의 노래를 듣고

… 그(바흐)는 연주자에게 말을 걸지 않는 유일한 작곡가다. 어떤 매개체로 연주해도 메시지가 전달된다. 바흐를 아코디언으로 연주하면 사람들이 운다. 마림바로 바흐를 연주해도 사람들이 운다. 낭만주의 작곡가들과 달리, 바흐는 악기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청중의 귀로 직접 향한다. … 우리는 손으로 바흐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바흐에게 손가락을 내주는 것이다.
- 알렉상드르 타로,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바흐의 이 유명한 종교 칸타타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나는 종교가 없음을 밝히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종교가 없는 내게 그의 종교(적) 음악과 그 안의 신은 어떻게 이렇게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 있는가. 이것이 바흐에 관한 내 오래된 질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바흐의 칸타타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 중에서도 제4곡 '시온은 파수꾼의 노래를 듣고'는 특히 널리 알려진 코랄이다. 이 곡이 내 전두엽에 붙어버린 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덕분이다. 올리버의 관심을 끌고 싶지만 실상은 그에게 nobody인 것만 같아 의기소침해 있던 엘리오에게, 올리버가 다가온다. 계기는 바흐의 카프리치오. 올리버가 바흐를, 아니 자기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다시금 몽글몽글해지는 엘리오의 마음을 보여줄 때 영화는 이 곡, '시온은 파수꾼의 노래를 듣고(이하 '시온')'를 흘려보낸다. 잠들지 않고 신랑(그러니까 예수)을 기다리던 시온의 딸들은 마침내 그분을 맞이하리니. 그러니 깨어 있으라. 언제가 될지 모르나 그가 오리라는 사실을 의심치 말고 기다리라. 이 코랄의 비유적 가르침이 엘리오의 상황과 맞는 듯도 하다.


이 노래가 첫눈에 내 마음을 훔친 건 아니다. 영화에서는 바흐의 카프리치오 장면이 더 좋았다. '사랑하는 형과 이별에 부치는 카프리치오'는 엘리오가 올리버의 관심을 받고 의기양양해지는 신에 사용되는 중요한 소품이다. 내가 '시온'에 열중하게 된 건 OST만 듣게 되면서부터였는데, 그나마도 완전히 빠져드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OST에 수록된 피아노 버전이 내가 선호하는 바흐 건반 연주 스타일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내 바흐 피아노 연주 이상형은 머레이 페라이어다(다만, 골드베르그 변주곡은 글렌 굴드의 1955년 녹음을(... 왠지 분하다!), 평균율 1번은 리히터를 듣는다). 바흐를 무생물로 만들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감상적인 연주는 경계한다는 점에서 머레이 페라이어는 내게 완벽한 바흐 피아노 주자이다. 그에 비하면 OST 속 연주는 완전히 불완전하다. 듣다 보면 삐그덕거리는 의자에 앉은 듯한 불편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발을 질질 끌고 가는 사람처럼 오른손은 자꾸만 박자에 뒤쳐져 발화하고, 이 순간 왼손과 오른손 박자는 지나치게 어긋난다. 그 어긋남은 가까스로 참을 수 있을 정도로 거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완전히 불완전한 연주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있다. 심하게 말하면, 바로 이 연주 버전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그 마법은 가장 세속적인 순간에 일어난다. 출근길 플랫폼에 들어오는 지하철을 따라잡기 위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달릴 때, 환승역에서 허겁지겁 달리듯 걸을 때, 지하철 역에서 회사까지 서둘러 걷는 13분, 회사 로비에 들어서 게이트 앞에 길게 이어진 출근 행렬을 마주할 때, 점심시간 나 혼자 홀연히 사라질 때, 사라지면서 삼삼오오 같은 방향을 향하는 직장인들을 바라볼 때가 그런 순간이다.


이런 순간 우연히 이 노래가 재생되면, 나는 잠시 다른 차원에 속한다. 나는 관조자가 되어 내가 속한 현실을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이 노래는 현실의 부산함과 떠들썩함으로부터 나를 떼어놓고, 그것을 풍경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데려다 놓는다. 현실의 시간에 맞추기 위해 씩씩거리고 헉헉거리며 다그치는 줄도 모르고 스스로를 다그치던 나는, 이 노래가 귓가에 울리는 순간, 다른 시간의 흐름에 속한다. 걸음을 늦추고 마치 내가 신이나 천사인 것처럼 인간을 바라보게 된다. 특히 짧은 단조 프레이즈가 흘러나올 때, 내 눈에 들어온 인간들은 가엾은 존재가 된다. 그리고 종교도 없는 나는,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신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때까지 주변의 인간들을 장애물이나 방해물로 인식하며 미워하던 마음에서 나는 잠시나마 해방된다.


바흐 음악의 신비한 점 중 하나는, 미천하고 모자란, 그래서 불완전한 인간을 묘사할 때조차 차갑고 냉정하게 심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흐(의 신)는 불완전한 인간을 연민의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그 시선에서 나는 다만 나약함과 미약함에 대한 슬픔과 불쌍히 여김의 따뜻한 감정만 느끼곤 한다. 5분 10초 동안 바흐는 평화와 평온, 고요함과 사색뿐 아니라 인류애라는 마법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내 영혼은 그렇게 정화받는다. 곧 다시 더러워지겠지만.


서두에 인용한 알렉상드르 타로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옳다. 심지어 불완전한 연주조차 바흐가 전달하려는 감동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존 엘리엇 가디너 경의 합창단이 노래하는 '시온은 파수꾼의 노래를 듣고'는 어떤 의미에서 완전히 다른 노래이다. 이 합창에서 사색이나 고요함보다는 깨달음, 기쁨과 옅은 환희의 감정이 내게는 상대적으로 도드라져 들린다. 워낙 단정한 곡이라 조심스럽게 드러나지만, 이 곡이 노래하는 성경구절에 부합하도록 노래는 높은음으로 높은음으로 발전한다. 그러니 이 곡의 감정에 대한 가디너 경의 해석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내겐 감동적인데, 이 지점에서 알렉상드르 타로의 말에 다시 한번 동의하게 된다(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 경이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의 말에 동의할지 무척 궁금하다).


바흐는 신을 향해 부르는 인간의 노랫소리가 신의 문장인 듯 들리게 한다. 바흐의 노래(특히 칸타타 같은 종교적인 노래들)는 신의 권위가 담긴 신의 진술이며 절대적인 문장이다.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부르는 노래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느껴지는지에 대해서라면 아직 더 많은 탐구가 필요하다. 오늘은 지금 내게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 곡의 코랄로 그 탐구의 문을 가볍게 두드려본다.




음악이 궁금하다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OST 중에서 : 유튜브에서 듣기

존 엘리엇 가디너, 몬테베르디 합창단 : 유튜브에서 듣기

영화가 궁금하다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내가 쓴 글 읽기

책이 궁금하다면

알렉상드르 타로,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풍월당,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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