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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Apr 12. 2021

#03 그녀는 그를 사랑했을까요?

생상스 -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생상스는 대개 지루한데 가끔 놀랄 만큼 아름다운 멜로디를 써요.


내가 이 아리아를 좋아한다고 하자, 클래식 애호가였던 지인이 말했다. 헤어지기 전에 생상스의 지루한 면에 대해 물어봤다면 좋았을걸. 덕분에 나는 생상스의 아름다움만을 안다.


생상스는 유명한 성경 일화, '삼손과 데릴라'를 오페라로 작곡했다. 이스라엘의 장사 삼손이 블리셋 여인 데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자기 힘의 원천을 발설해버리고 곤경에 빠졌다가 신의 힘을 빌어 마침내 성을 무너뜨림으로써 블리셋인들과 함께 그 자신도 죽음을 맞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아리아,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Mon coeur s'ouvre à toi voix'는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곡일 것이다.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건 마리아 칼라스 컴필레이션 음반에서였다.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마침내 이 노래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냈다. 스물여섯 살의 내게 이 아리아는 달콤하고 간절하게 들렸다. 무엇보다 관능적이었다.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 만큼은 아니었지만(이 곡은 완전한 황홀경이 죽음처럼 지속된다. 망망대해의 일렁이는 수면에 몸을 맡긴 느낌이다. 이 느낌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언제 들어도 기묘한 선율이다), 확실히 로맨틱과 에로틱 사이의 감각을 자극했다.


데릴라는 이 노래를 부르는 5분 30초 간, 삼손을 설득한다. 그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한 발자국씩, 서두르지 않고, 주도면밀하게 포위망을 좁혀나간다. 눈물이라는 무기와 사랑이라는 인질로 서서히 삼손의 마음을 무장해제해가는 과정이 곧 이 아리아인 것이다.


Ah! réponds à ma tendresse!

내 애정에 응답해줘요!

Verse-moi, verse-moi l'ivresse!

날 환희에 넘치게 해줘요!


절정은 위 후렴구이다. 찰랑대는 반주 위에서 6박자에 리타르단도까지 더해 C 음으로 시간을 끌며 긴장을 고조시킨 후, 데릴라는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타격이다. 데릴라의 노래는 제일 높은 음에서부터 반음 또는 한음 씩 부드럽게 떨어져 이미 반쯤 포로가 된 삼손을 손쉽게 나즈막한 곳으로 이끈다. 특히 마지막 구절, Verse-moi, verse-moi l'ivresse! 는 절정이면서 해소이다. 이 순간을 향해 쌓아 온 감정은 바로 여기서 조용히 폭발해버린다. 그 폭발은 분홍이 많이 도는 보라색 드라이아이스 연기 같은 것이다. 굉음도 파편도 없다. 다만 사라지는 것이다. 과연 옛 지인의 말대로, 놀랄 만큼 아름다운 멜로디이다. 듣고 있으면 삼손이 아닌데도 나는 매번 녹아내리고 만다. 이때 곡 자체의 완급조절이 너무나 극적이라서 듣는 나 역시 환희를 느끼게 될 지경이다. 데릴라 뒤에서 살랑대고 찰랑대는 플룻과 하프, 클라리넷 때문에도 혼이 빠진다. 결국 두 번째 후렴구에서 이 가사를 들은 삼손은 데릴라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만다. 백분 이해한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톰 행크스가 아닌 다음에야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내게 마리아 칼라스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의 연기는 일반적으로 정말정말정말 뛰어나지만(이에 대한 증좌는 커밍 수운이다. 두둥!), 내가 찾는 것은 그의 노래에 없었다. 내겐 너무 비장했다. 물론 데릴라가 비장할 거라는 주장은 설득력 있다. 그녀는 스파이니까. 민족의 운명을 등에 지고 있으니까. 목숨을 걸고 상대의 약점을 찾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방법은 유혹이니까. 그렇지만 난 좀 더 부드럽고 달콤하며 뱀 같은 목소리를 찾아 헤맸다. 딱 한번, 유튜브에서 온전한 프랑스어로 불리는 걸 들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껏 들어본 최선의 데릴라였지만 슬프게도 다시는 찾지 못했다. 결국 타협점은 마리아 칼라스와 엘리나 가랑차였다. 가랑차는 부드럽고 달콤한 쪽에 치우친 느낌이 아쉽다. 타협은 했지만 나는 아직도 나의 완벽한 데릴라를 찾는 여정에 있다.


데릴라는 삼손을 사랑했을까요?

  - KBS클래식FM, 노래의 날개 위에, 2021.04.02


정세진 아나운서가 저 질문을 한 순간 나는 곤란에 빠졌다.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은근슬쩍 회피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다운 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아름다움에 깃든 치명적인 독을 인정하면 아름다움이 위험에 빠질 것만 같았다.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서사나 인간 내면에 대해 생각해야 해서 내 감상이 방해받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저 질문이 타자에게서 발사되자, 더는 답을 유보할 수 없었다. 나는 생각해야 했다.


데릴라는 삼손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저 노래를 하는 순간에는. 그게 아니라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 자신조차 속인 게 아닐까. 나, 데릴라는 삼손을 사랑한다고 말이다.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는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더구나 삼손처럼 의지가 강한 사람을 속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때로 가짜를 연기한다. 그리고 어떤 순간 그 가짜는 진짜가 되기도 한다. 흠. 하지만 이것은 결국 내가 데릴라라면? 에 대한 답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사람은 대개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평가하고 설명하고 유추하는 존재이지 않던가.


다행히도 거짓과 배신, 그 부도덕함도 이 노래의 아름다움을 벌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아름다움은, 그리고 어쩌면 사랑도 옳고 그름, 선하고 악함과 다른 영역에 존재할 것이다.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는 위험하고 나쁜 아름다움. 이 긴장과 갈등이 오히려 이 노래를, 그리고 삼손과 데릴라의 서사를 그토록 오래 존재하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음악이 궁금하다면

마리아 칼라스 : 유튜브에서 듣기

엘리나 가랑차 : 유튜브에서 듣기

영화가 궁금하다면

캐치 미 이프 유 캔 : 감자의 영화 이야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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