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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Apr 17. 2021

#04 선생님은 모차르트가 싫다고 하셨어

모차르트 - 피아노 소나타 10번 1악장 (K.330)

스타벅스에 들러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켰다. 큰 테이블 맞은편 자리에는 대학생 두 명이 큰 책을 펴두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가게에는 클래식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무의식중에 음악에 맞춰 코를 흥얼거렸다. 아주 복잡한 피아노 소리에 맞춰 흐흐흐흐흥. 흐흥. 흐흐흐흥. 17세기의 음악을 비욘세 음악처럼 흥얼거릴 수 있다니.

- 오지은,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中 ‘애매한 오스트리아’


오지은 씨가 비엔나에서 들었던 "아주 복잡한 피아노 소리"는 무슨 곡이었을까? 18세기 사람이긴 하지만, 나는 저 문장에서 모차르트를 떠올리곤 한다. 나는 자주 모차르트 음악을 흥얼거리니까(비욘세 음악은 못한다..). 그리고 그의 노래에는 "음표가 많"으니까. 아주, "쉴 틈 없이".


재작년에 갑자기 모차르트가 그리워져서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가볍지 않은 불안과 우울로 녹초가 된 나는 순도 높은 즐거움에 목말라 있었다. 현실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 이 세상 것이 아닌 명랑함을 갈구했다. 들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를 연주하고 싶었다. 모차르트는 클라리넷, 오보에, 하프 등을 위해 작곡했지만, 주변에 좋은 첼로주자가 없었는지 첼로 곡은 전혀 쓰지 않았으므로 모차르트를 연주하려면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택해야 했다. 나는 모차르트를 연주하기 위해 이십 몇 년만에 피아노를 만졌다.


음악의 존재 양식은 시간이다. 연주되는 음악은 리듬과 박자라는 시간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림과 달리 정지한 순간으로써 영속할 수 없다. 한 눈에 인지하기도 불가능하다. 음악을 감상하려면 연주 시간 동안 음악을 들어야만 한다. 연주행위가 끝나면, 즉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순간의 예술이기도 하다(물론 기술과학의 은총으로 레코딩 해서 순간을 박제할 수 있다). 연주가 이뤄지는 동안 악기/목소리는 공기에 진동을 일으킨다. 그 진동은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고도 완벽한 인체기관인 귀(유지비용이 막대한 데 비하면 상당히 불완전한 시각과 대조를 이룬다)를 자극한다. 그 자극은 뇌에서 음악(또는 소음)으로 해석될 것이다.


일시적인 청각 자극으로 존재하는 음악은 오선지 위의 음표라는 약속된 기호 체계를 통해 지속 가능해진다. 악보를 통해 재현됨으로써 음악은 구전이나 기억에 의존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더 널리 유통될 수 있다. 물론 아르농쿠르의 말처럼 악보라는 기표가 시대의 상식까지 기의할 수 없으므로, 17-8세기 악보를 21세기 인간이 작곡자의 의도 그대로 재현하는 기적은 기대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악보가 있어서 우리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1번'도 연주하고 듣는 행운을 누린다(특히 이 두 곡은 유실되었다가 몇 백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 보물들이다).


음표의 높낮이와 길이, 악상기호로 표현된 작곡/편곡자의 명시적 지시와 연주자(또는 선생님)/지휘자가 해석해내는 암묵적 지시. 이 지시들을 최대한 적확하게 (또는 창의적으로) (음악)소리라는 무형의 형체로 구현해내는 행위 혹은 과정이 연주performance일 것이다.


이 과정을 함께 한 모든 곡, 그러니까 연주했던 모든 곡은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열번, 스무번, 연습을 반복할수록 애착은 강해진다. 내 연주실력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종이 위의 기호를 읽고 해석하고 외워서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쌓아가는 우정 같은 것이다. 모차르트 소나타도 예외는 아니다. 19곡의 피아노 소나타 중, 1년 동안 한 악장이라도 읽어본 곡은 10곡 남짓. 그는 한순간도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 순전한 기쁨이여(예외조항 단조는 다음 기회에)!


나는 그중에서도 10번에 열중했다. 악장 구조와 흥미로운 박자배열이 어떻게 곡의 발랄함에 기여하는지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하고 명료한 쪽을 택하겠다. 나는 이 C장조가 발산하는 티 없는 기쁨에 매료되었다. 그중에서도 1악장은 ‘복잡할 게 뭐 있어, 다만 기쁨 말이야!’, 라고 내게 말 거는 귀여운 작은 친구다. 물론 그러다 어른인 척 낮은 목소리로 근엄하게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귀엽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연주 실황의 특장점은 연주자의 표정과 몸짓에 이 감정이 온전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뛰어난 테크닉, 정확한 연주력과 동시에 까다롭기로 명성이 높은 이 아저씨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막 손에 쥔 아이처럼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1악장을 연주한다. 이례적이고 인상적인 퍼포먼스다. 쉴 새 없는 8분 음표와 16분 음표들을 그처럼 신나고 가볍고 사랑스럽게 해치우는 연주자의 모습은 늘 나를 웃음짓게 만든다. 물론 연주가 완벽하다는 점은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메르만이지 않은가.


그보다 더 좋아하는 연주는 클라라 하스킬의 1954년 레코딩이다. 아이같은 무심함이 밴 이 연주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의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귀여우려는 '노력', 사랑스러우려는 '노력', 가벼우려는 '노력'. 그의 연주에는 아무런 노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녀가 연주하는 이 노래는 악보를 벗어난다. 악보를 넘어선 완전한 노래로서 존재한다. 주관적인 리듬에 따라 조금 빨리 달려나가는 패시지마저도 완벽하다. 모차르트라면 이렇게 연주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피아노 선생님은 음표가 너무 많고 쉴 틈이 없다며 자주 모차르트를 흉보곤 하셨다. 베토벤을 좋아한다고 하셨으니, 아마 모차르트는 깊이도, 무게도 없고 유치하다고(또는 피상적이라고) 생각하셨을지 모르겠다. "너무 많은" 음표들을 경박함의 증거로 보지 않으셨을까? 또는 전공자로서 어린 시절 콩쿨에서 연주해야 했던 과제 같은 기억만을 갖고 계셨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내겐 다행인 일이다. 내 사랑은 의무로부터의 자유와 무지 덕분에 가능한지도 모르니까. 그저 아이처럼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사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음악이 궁금하다면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 유튜브에서 듣기

클라라 하스킬 : 유튜브에서 듣기

책이 궁금하다면

오지은,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이봄, 2018

빌 브라이슨, <바디>, 까치, 2020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바로크 음악은 '말'한다>, 음악세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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