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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7. 2021

36주.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8)

2020. 03. 08. by 만정

이 영화와 바르다 감독은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 소개받았던 것 같다. 봉우리만 눈으로 덮인 한라산 같은 투톤 헤어스타일을 한 이 88세 할머니가 누벨바그의 대표주자였다는 사실을 안 것은 좀 더 나중 일이다. 누벨바그라니. 솔직히 장 뤽 고다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도 들을 때마다 놀란다. 하버마스가 살아있다는 데 놀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미 위대한 역사로 확정된, 지나간 역사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거장이 나와 함께 오늘도 숨 쉬고 있다는 것이 영 이상해서이다. 이상하거나 말거나, 영화는 (분명!) 살아있는 거장 바르다와 젊은 사진작가 JR이 사진트럭을 타고 마을과 풍경, 얼굴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로드무비이다.


두 사람이 찾는 장소는 일종의 시골이다. 광산마을, 농촌, 공장, 항만. 시골이라고는 못해도 도시로부터 거리가 있다. 풍광 좋은 프랑스 여행지와는 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보통의 사람들을 만난다. 광부의 딸, 농부, 카페 점원, 염산공장 노동자, 시골마을 우체부, 염소 기르는 사람, 항구 노동자들과 그 아내들. 아녜스와 JR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담은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은 작품집이 되거나 미술관에 걸리는 대신, 집 벽면, 농장 창고나 공장 통로, 폐허가 된 마을의 허물어져가는 집, 항만 컨테이너 같은 곳에 붙는다.


신기하게도 영화에 담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있다. 신기하다고 생각한 것은-물론 유독 감동적인 사연만 영화에 남겨지기도 했겠지만-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직접 말하는 자신의 논리와 철학, 자기 삶에 대한 신념이 결코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거 중인 광산마을에서 자기 집을 지키는 한 할머니는 광부였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집에 애착을 표현하며 고집스럽게 그 집을 지켜나간다. 생산성과 수익성이라는 명목 하에 많은 것이 희생되는 오늘날, 어떤 농장주는 염소의 뿔-경쟁심 강한 염소들이 싸울 때 서로를 상하게 만드는-을 태우지 않음으로써 동물로서 염소를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전한다. 르아브르 항만 노동자의 아내들은, 파업과 강성노조에 대한 비판적 여론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각자의 입장을 지켜야한다”고 말한다. 눈물을 흘리거나 호소하는 대신, "예전에 파업했던 아버지들 덕분에 지금의 권리를 얻은 것"이라는 의견을 당당하고도 담담하게 밝히는 것이다. 자기 입장을 이렇게 또렷하고 자신 있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프랑스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걸까? 노동자도 자본가 입장에서 생각하는 한국의 안타까운 현실을 생각하면 항만에서 만난 그녀들의 당당한 발언이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한편, 사진이라는 예술로 외화된 자기 이야기를 마주할  사람들이 느끼는 놀라움 역시 영화에 담겨있다. 자기 신념과 의지, 철학을 말로써 분명하게 표현하던 사람들조차,  무형의 내면이 거대한 이미지가 되어 건물 벽면이나 컨테이너 더미에 붙은 것을  순간, 이제야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는  놀라고 감동받는  같았다. 마치 자기 모습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놀라움은 사진을 보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해진다. 염산공장 노동자의 말처럼, “예술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 생활인들이 접근하기 쉬운 곳에 예술을 게시함으로써 누구나 감동과 놀라움을 느낄  있도록 하자는 것이, 어쩌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바르다 감독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건 정말이지, 예술에 대한 가장 유쾌하고 따뜻한 정의가 아닐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루브르 신이다. 이 장면은 고다르의 영화 ‘국외자들’에 등장하는 루브르 횡단 장면을 오마주 또는 패러디한 것이다. 바르다 할머니가 탄 휠체어를 JR이 천방지축으로 밀며 루브르의 전시실 하나를 횡단한다. 바르다 감독은 “벨리니!”, “기를란다요!”, “보티첼리!”, “라파엘로!” 같은 이태리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을 지나며 그들을 감탄사로 호명한다. 아름답긴 하지만 루브르에 걸려있으니, 그 예술은 아녜스와 JR의 작업처럼 누구에게나 허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루브르 신은 일종의 엄숙주의에 날리는 상큼한 펀치 아니었을까. 그러나 장면이 담고 있는 의미와 무관하게, 그것이 주는 영화적인 즐거움과 쾌감이 무엇보다 오래 잔상으로 남는다.


오늘 다시 한 번 영화를 보면서 새삼 발견한 것은, 사람들 사연 속에 자리 잡은 바르다 감독 자신의 이야기이다. 처음 볼 때에는 알아채지 못했었는데, 단편적인 것처럼 보였던 각 사연들 사이에는 은근히 바르다의 기억이라는 연결고리가 자리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바르다 감독은 젊은 새 친구 JR로부터 자신의 오랜 친구 장 뤽 고다르 감독을 떠올리는데, 마지막 여정이 고다르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이것은 스포일러인가..). 또한 노인과 늙음, 죽음이라는 주제가 꾸준히 반복되고 있었다. 바르다 감독은 자기 나이가 언급되는 것을 탐탁찮아 하고, 눈에 생긴 문제에 대해 말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묘소에서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는 JR의 질문에 답하고, 백세 되셨다는 JR의 할머니를 만나기도 한다. 늙음과 죽음이라는 주제가 이번에 유독 눈에 띈 건 어쩌면 바르다 감독이 작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볼 때만해도 눈 조금 불편해지셨다고 곧 부고를 들으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필름클럽을 통해 소식을 들었던 그날 퇴근길에 황망했던 마음이 기억난다.


이 영화의 사랑스러운 점은 바르다 감독과 JR의 우정이다. 33세 젊은이와 88세 할머니는 사진작가였고, 포토트럭을 타고 여행하면서 같이 영화를 찍었으며, 친구가 되었다. 아녜스는 JR이 선글라스와 모자를 결코 벗지 않는다고 마뜩찮아 하긴 했다. 그래도 JR은 위대한 늙은 거장에게 서슴없이 농담을 하고, 장난을 쳤다. 아녜스도 자신을 대하는 JR의 태도가 무례하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녜스가 부끄러워하는 작은 발 사진을 찍을 때 웃음을 참지 못하는 두 사람의 장면이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언젠가 고다르가 그랬던 것처럼, 아녜스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마침내 선글라스를 벗는 JR의 모습이-영화적인 연출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에 남는다. 이런 예술과 우정이라면, 인생은 좀 괜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일요일 밤에도 예술과 우정의 축복이 내려앉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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