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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Apr 18. 2021

03. 알지만 모르는 노래

"아, 말씀드릴게요, 어머니"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모차르트

큰 테이블 맞은편 자리에는 대학생 두 명이 큰 책을 펴두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가게에는 클래식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무의식중에 음악에 맞춰 코를 흥얼거렸다. 아주 복잡한 피아노 소리에 맞춰 흐흐흐흐흥. 흐흥. 흐흐흐흥. 17세기의 음악을 비욘세 음악처럼 흥얼거릴 수 있다니.     


- 오지은,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中 ‘애매한 오스트리아’


물론 나도 노래한다. 출근길에는 되도록 주변에서 알아차릴 수 없도록 조심스럽게 흥얼거린다. 흥에 겨울 때에는 주변에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고개를 까딱거리거나 몸을 흔들며 리듬을 탄다. 샤워할 때, 퇴근 후 옷을 갈아입는 동안, 밥이 되길 기다리는 동안에는 종종 소리 높여 부르기도 한다. 내가 하는 노래는 대체로 오지은 씨가 비엔나에서 들었다는 바로 그런 것이다. 흐흥. 흐흐흐흥. 굳이 인용까지 한 건 가사는 없지만 혼자 부른 걸로 쳐달라는 뜻이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클래식을 많이 들었다고 하신다. 내가 클래식을 가까이 하는 데 대한 엄마의 단골 설명이다. 내 보기엔, 트롯이나 한국 가요를 좋아할 또래의 아줌마 아저씨들과 달리 기회가 될 때면 언제라도 클래식 음악이나 공연을 즐기는 엄마를 닮은 것 같다. 우리는 12월 31일 밤 비엔나에서 베토벤 합창 교향곡을, 로마에서는 라보엠과 토스카 공연을 함께 즐겼다. 내 서울 집에 둘이 있을 땐 늘 클래식 FM을 틀어둔다. 태교 덕분이든 유전의 힘이든, 엄마와 이런 것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멋진 일이다.


엄마가 태초에 내게 심어둔 작은 씨앗은 97년 무렵부터 갑자기 무성하게 자라났다. 한 달에 한 번 용돈을 받으면 자유상가 2층 레코드점에 들렀는데, 모차르트가 내게 영속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다만 서너 장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중 한 앨범은 너무 자주 들어서 나 뿐 아니라 동생도 다음 트랙을 자연스럽게 흥얼거릴 정도였다. 특히 우리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의 2악장을 좋아했다. 난 아직도 널리 알려진 (경박스러운) 1악장보다 2악장이 낭만적이고 기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십여 년 동안은 모차르트를 거의 듣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바흐가 더 중요했던 데다 그 남자를 만난 후로는 마침내 락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두둥!). 새롭게 탐구할 세계는 너무도 방대했다. 무엇보다 갑자기 잘 들리지 않았다. 십대에 모차르트는 너무나 직관적이고 쉬워서 아무것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세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좇느라 애를 먹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경험한 바, 우울증의 신비한 점이 있다면,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즐거움을 희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무작정 즐겁고 싶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친 건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순도 높은 즐거움. 마치 세상에 슬픔과 괴로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외면하고-또는 철저히 숨겨두고- 즐거움에 일로매진하는 모차르트만이 나의 구원이 될 것이었다. 나는 다시 모차르트의 세계를 찾았고, 서먹하던 우리는 금세 옛 우정을 회복했다.


이 곡, ‘“아, 말씀드릴게요, 어머니”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주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ABC송도, 동요 반짝반짝 작은 별도 그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것이니 말이다. 주제부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도 아니다. 모차르트는 프랑스의 가곡에 변주곡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뿐이다’라는 말은 매우 부적절한 표현인데, 랑랑의 해석처럼, 7~14분 사이의 피아노 소품 안에서 이미 오페라의 요소들, 마술피리의 전조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11번째 변주이다. 강렬한 마지막 변주와 대비를 이루려는 듯, 아다지오로 템포가 느려진다. 모차르트 특유의 숨 쉴 틈 없는 음표들도 갑작스레 듬성듬성해진다. 작고 여리게, 피아노로 연주하게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변화로 주목을 끈 다음, 그는 갑자기 나를 알프스로 데려간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그 알프스 말이다. 눈을 감고 이 부분을 듣고 있자면,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마치 높고 푸르고 너른 들판에 선 것처럼 주변의 공기를 크게 한번 들이마시게 된다. 이 첫 패시지가 지나면 섬세하디 섬세한 멜로디가 이어진다. 아르농쿠르가 말했다는 것처럼 약간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하모니다. 나는 사무실에 들어서기 전에 서정적인 이 변주를 한 번 더 듣고 싶어, 엘리베이터 앞을 잠시 서성이기도 한다.


 곡은 연주자 간의 차이를  모르겠다는 당신에게 답할 좋은 예이기도 하다. 내가 제안할  연주자는 완전히 다른 연주를 한다. 클라라 하스킬은 사연이 많은(기구한) 전설적인 연주자로서, 특히 모차르트 연주로 유명하다. 그녀의 터치가 만들어내는 모차르트는 지나치게 투명하지도 여리지도 않은데,  점이 마음에 든다. 나는 그것이 아이 같은 무심함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역시 그녀답게 연주하는데, 다만 너무 무심해서 일관되게 빠르게 연주되고  때문에 나의 페이보릿, 11 변주가 감탄할  없이 지나간다.  때문에  곡만큼은 안드레아 쉬프의 연주를 듣는다. 완벽하다기 보다는, 듣기에 거슬림이 없다. 그는 11 변주를 특별히  느리고 여리게 연주하는데,  역시 나만큼  변주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정명훈의 연주는 너무 재밌어서 추천한다. 무려 뵈젠도르퍼로 연주하는데, 한음 한음을 어찌나 까랑까랑하고 땅땅하게 내는지, 맞으면 뼈가 부러질  같다. 그의 무표정함은  재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연주가 성품을 드러낸다면, 그는 꼬장꼬장한 사람이 아닐  없다.


이 밤, 나는 바로 어제 당신이 다녀간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모차르트 대신 고전적인 매미의 다소곳한 울음을 듣고 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려나.




당신도 듣고 싶다면

클라라 하스킬 https://youtu.be/d3O-gIqJ0Tc

안드레아 쉬프 https://youtu.be/JRadlzpekms

정명훈 https://youtu.be/MYSk2r9Yq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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