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말씀드릴게요, 어머니"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모차르트
큰 테이블 맞은편 자리에는 대학생 두 명이 큰 책을 펴두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가게에는 클래식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무의식중에 음악에 맞춰 코를 흥얼거렸다. 아주 복잡한 피아노 소리에 맞춰 흐흐흐흐흥. 흐흥. 흐흐흐흥. 17세기의 음악을 비욘세 음악처럼 흥얼거릴 수 있다니.
- 오지은,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中 ‘애매한 오스트리아’
물론 나도 노래한다. 출근길에는 되도록 주변에서 알아차릴 수 없도록 조심스럽게 흥얼거린다. 흥에 겨울 때에는 주변에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고개를 까딱거리거나 몸을 흔들며 리듬을 탄다. 샤워할 때, 퇴근 후 옷을 갈아입는 동안, 밥이 되길 기다리는 동안에는 종종 소리 높여 부르기도 한다. 내가 하는 노래는 대체로 오지은 씨가 비엔나에서 들었다는 바로 그런 것이다. 흐흥. 흐흐흐흥. 굳이 인용까지 한 건 가사는 없지만 혼자 부른 걸로 쳐달라는 뜻이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클래식을 많이 들었다고 하신다. 내가 클래식을 가까이 하는 데 대한 엄마의 단골 설명이다. 내 보기엔, 트롯이나 한국 가요를 좋아할 또래의 아줌마 아저씨들과 달리 기회가 될 때면 언제라도 클래식 음악이나 공연을 즐기는 엄마를 닮은 것 같다. 우리는 12월 31일 밤 비엔나에서 베토벤 합창 교향곡을, 로마에서는 라보엠과 토스카 공연을 함께 즐겼다. 내 서울 집에 둘이 있을 땐 늘 클래식 FM을 틀어둔다. 태교 덕분이든 유전의 힘이든, 엄마와 이런 것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멋진 일이다.
엄마가 태초에 내게 심어둔 작은 씨앗은 97년 무렵부터 갑자기 무성하게 자라났다. 한 달에 한 번 용돈을 받으면 자유상가 2층 레코드점에 들렀는데, 모차르트가 내게 영속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다만 서너 장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중 한 앨범은 너무 자주 들어서 나 뿐 아니라 동생도 다음 트랙을 자연스럽게 흥얼거릴 정도였다. 특히 우리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의 2악장을 좋아했다. 난 아직도 널리 알려진 (경박스러운) 1악장보다 2악장이 낭만적이고 기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십여 년 동안은 모차르트를 거의 듣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바흐가 더 중요했던 데다 그 남자를 만난 후로는 마침내 락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두둥!). 새롭게 탐구할 세계는 너무도 방대했다. 무엇보다 갑자기 잘 들리지 않았다. 십대에 모차르트는 너무나 직관적이고 쉬워서 아무것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세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좇느라 애를 먹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경험한 바, 우울증의 신비한 점이 있다면,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즐거움을 희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무작정 즐겁고 싶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친 건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순도 높은 즐거움. 마치 세상에 슬픔과 괴로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외면하고-또는 철저히 숨겨두고- 즐거움에 일로매진하는 모차르트만이 나의 구원이 될 것이었다. 나는 다시 모차르트의 세계를 찾았고, 서먹하던 우리는 금세 옛 우정을 회복했다.
이 곡, ‘“아, 말씀드릴게요, 어머니”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주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ABC송도, 동요 반짝반짝 작은 별도 그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것이니 말이다. 주제부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도 아니다. 모차르트는 프랑스의 가곡에 변주곡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뿐이다’라는 말은 매우 부적절한 표현인데, 랑랑의 해석처럼, 7~14분 사이의 피아노 소품 안에서 이미 오페라의 요소들, 마술피리의 전조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11번째 변주이다. 강렬한 마지막 변주와 대비를 이루려는 듯, 아다지오로 템포가 느려진다. 모차르트 특유의 숨 쉴 틈 없는 음표들도 갑작스레 듬성듬성해진다. 작고 여리게, 피아노로 연주하게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변화로 주목을 끈 다음, 그는 갑자기 나를 알프스로 데려간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그 알프스 말이다. 눈을 감고 이 부분을 듣고 있자면,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마치 높고 푸르고 너른 들판에 선 것처럼 주변의 공기를 크게 한번 들이마시게 된다. 이 첫 패시지가 지나면 섬세하디 섬세한 멜로디가 이어진다. 아르농쿠르가 말했다는 것처럼 약간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하모니다. 나는 사무실에 들어서기 전에 서정적인 이 변주를 한 번 더 듣고 싶어, 엘리베이터 앞을 잠시 서성이기도 한다.
이 곡은 연주자 간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는 당신에게 답할 좋은 예이기도 하다. 내가 제안할 세 연주자는 완전히 다른 연주를 한다. 클라라 하스킬은 사연이 많은(기구한) 전설적인 연주자로서, 특히 모차르트 연주로 유명하다. 그녀의 터치가 만들어내는 모차르트는 지나치게 투명하지도 여리지도 않은데, 그 점이 마음에 든다. 나는 그것이 아이 같은 무심함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 곡 역시 그녀답게 연주하는데, 다만 너무 무심해서 일관되게 빠르게 연주되고 그 때문에 나의 페이보릿, 11 변주가 감탄할 틈 없이 지나간다. 이 때문에 이 곡만큼은 안드레아 쉬프의 연주를 듣는다. 완벽하다기 보다는, 듣기에 거슬림이 없다. 그는 11 변주를 특별히 더 느리고 여리게 연주하는데, 그 역시 나만큼 이 변주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정명훈의 연주는 너무 재밌어서 추천한다. 무려 뵈젠도르퍼로 연주하는데, 한음 한음을 어찌나 까랑까랑하고 땅땅하게 내는지, 맞으면 뼈가 부러질 것 같다. 그의 무표정함은 이 재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연주가 성품을 드러낸다면, 그는 꼬장꼬장한 사람이 아닐 리 없다.
이 밤, 나는 바로 어제 당신이 다녀간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모차르트 대신 고전적인 매미의 다소곳한 울음을 듣고 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려나.
당신도 듣고 싶다면
클라라 하스킬 https://youtu.be/d3O-gIqJ0Tc
안드레아 쉬프 https://youtu.be/JRadlzpek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