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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런 Aug 15. 2019

충수돌기야, 잘가!

맹장터진이야기, 아홉 번째

맹장터진이야기, 여덟 번째 에서 계속..




*매우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을 묘사했지만, 일상적인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Day 23: 월요일 (수술 당일)

군부대로 휴가 복귀하는 기분. 진료받으러 오셨나요? 아뇨, 수술받으러 왔습니다. 그럼 오늘 차 안 빼시겠네요? 네, 아마 내일모레 퇴원할 것 같아요. 발렛파킹을 맡기고 차에서 내렸다. 짐 다 꺼내신 거예요? 나의 단출한 짐을 보고 놀란 아저씨. 오늘 뱃속에서 맹장을 덜어내면 더 단출한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데자뷰 같은 두 번째 입원 수속. 병실은 지금 1인실, 2인실 그리고 다인실까지 모두 가능하세요. 2인실까지는 보험이 적용되시고요. 지난번의 기억을 더듬으며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1인실은 2인실 가격의 3배. 어르신들은 대체로 다인실을 선호하시는 것 같고, 프라이버시를 완전 중시하는 사람은 1인실로 가겠지? 2인실은 수요가 적거나 나처럼 머리를 굴리는 젊은이일 거야. 그럼, 2인실로 할게요.


아니나 다를까 다인실은 절반 정도 차 있고, 2인실은 비어 있었다. 환복 후 수술을 기다리며 여덟 번째 맹장터진이야기를 업로드하는데 간호사님이 들어왔다. 2시쯤 수술실로 내려가실게요. 근데 마취과에서 연락이 오면 조금 일찍 내려가실 수도 있으니까 준비하고 계세요. 갑자기 두근두근.


마음을 다스리며 책을 읽는데, 여덟 번째 맹장터진이야기에서 바지가 터진 사연을 읽은 우리 팀 디자이너가 슬랙으로 자신의 최애곡이라며 링크를 보내왔다. 기특한 사람.

가사 첫소절: 자꾸만 내가 바지를 찢었거든...


한 시쯤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맥북을 펼쳐놓은 나를 보고 웃었다. 두 번째네요. 네? 전에 어떤 학생도 수술하기 전이랑 수술하고 나서랑 열심히 공부하더라고요. 수술하기도 전에 일을 하시네. 혹시 사장님이세요? 아뇨, 전 그냥 노동자예요. 갑자기 슬픔. 수술이 약간 미뤄져서 이따가 두 시 반쯤에 할 거예요. 그럼 이따가 수술실에서 뵙겠습니다.


수술은 예정보다 조금 더 늦은 세 시에 시작되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보라색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님이 머리에 푸른색 봉지를 씌워주었다. 이쪽에 머리 대고 누우세요. 자, 허리 잠깐 들어주세요. 모포 같은 것을 허리 밑으로 밀어 넣더니 양쪽 끝으로 내 양팔을 감싼 후 다시 몸통 안으로 밀어 넣어 순식간에 나를 포박했다. 이윽고 마취과 의사 선생님처럼 보이는 분이 산소마스크를 나의 눈코입에 걸쳐놓고, 지금 들어가는 건 산소라고 안심시켰다. 마취는 잠시 후에 팔에 주사로 들어가는데 약간 혈관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욱씬욱씬. 레드-썬.


의식을 차려보니 다시 병실. 간호사님은 침대 각도를 조절해주며 괜찮냐고 물었다. 네, 괜찮.. 이 세상 모든 목마름을 내가 짊어진 듯 목이 턱 막혔다. 수술 전에 들었던 유의사항이 떠올라,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으면서 기침을 했다. 크헉. 배가 너무 아파 허리를 굽히자, 기침할 때 배를 손으로 잡고 하시면 조금 나아요, 의사 선생님의 꿀팁. 연달아 기침 아닌 기침을 열심히 내뱉고 있으니, 너무 많이 하려고 안 해도 된다는 선생님. 아니, 많이 하라고 하셨잖아요.


너무 아프거나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내 코에 씌워진 산소 튜브를 제거하며 간호사님이 말했다. 승모근이 아픈데, 정상인가요? 네, 그러실 수 있어요.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으니 구석구석 통증이 느껴졌다. 손발이 되게 저리네. 복부가 아래쪽부터 그라데이션으로 저릿저릿. 명치 쪽도 먹먹하고. 허허, 배 되게 아프네.


다채로운 통증에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아내와 부모님께 전화했다. 수술이 조금 늦게 시작돼서 이제 끝났어요. 걱정마세요. 전화를 마치자마자 귀신같은 팀원이 DM을 보냈다. 수술 중이시죠? 이거 최종 확인 한 번 부탁드려요. 오, 이토록 그로테스크한 DM이 있을까!


마취가 덜 풀렸는지 가만히 있어도 손가락이 자꾸 쪼그라들길래 DM 대신 전화를 걸었다. 팀원에게 걸었는데 갑자기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룹장님의 목소리. 꼬부랑 혀로 통화를 마치니 밀려오는 통증의 쓰나미. 피곤하지만 아파서 잠들 수 없는 몸뚱이. 화생방 훈련을 떠올리며 힘차게 심호흡을 했다. 중간중간 배 잡고 기침. 통증아, 사라져라!


조금 이따가 찾아온 아내. 괜찮아? 배가 아프긴한데, 괜찮아. 그럼 나 삼김 좀 먹어도 되겠니? 쿨럭쿨럭. 나 웃으면 배가 너무 아프니까 웃기지 마. 발치에 앉아 삼각김밥을 맛있게 먹는 그녀. 전주비빔밥이야? 아니, 이건 춘천닭갈비. 그렇구나.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걸어보려는데, 승모근이 너무 아프고 속이 메슥거려서 도로 침대에 누웠다. 심호흡을 크게 내쉬며 아내를 보낸 후, 다시 배를 잡고 열심히 기침. 통증이 조금 잦아들자 간호사님이 찾아오셨다.


소변 아직 안 보셨죠? 양 좀 체크해볼게요. 차갑습니다. 차가운 젤과 차가운 기계가 차례로 아랫배를 스쳤다. 많이 차 있어요. 별로 그런 기분은 아닌데요. 지금 500이니까 거의 생수 한 통 정도 차 있어요. 엇, 그럼 화장실에 다녀올게요. 네, 한 번 시도해보세요.


아홉 시가 지나 이번에는 간호사님 세 분이 함께 오셨다. 아직 소변 못 보셨어요? 다시 한번 시도해보시고, 안 되겠다 싶으면 알려주세요. 하지만 요의가 없는데요? 성인 남자의 경우에는 더 참을 수 있는 경우도 있는데, 혹시나 나중에 너무 양이 많아지면 관을 넣어서 빼야 되는데.. 그런 일은 없어야 하니까..


간호사님의 마지막 말에 정신이 번뜩 들어서 세면대 물을 틀어놓고 정신을 집중했다. 세상에! 이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단 말인가. 생수 한 통 이상이라던데 어찌 조금의 텐션도 없는가. 힘 빼기의 기술. 찔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간호사님을 찾아갔다.


진통제를 한 대 놔드릴게요. 겉으로는 참고 있을지 몰라도 속으로 아파서 괄약근에 힘이 안 빠질 수도 있거든요. 효과가 나타나는데 30분 정도 걸리니까 그 이후에 한 번 다시 가보세요. 잠 못 드는 밤의 시작. 1시간이 지났건만 요의가 없었다. 이대로 그곳에 관을 삽입하는 신세가 되는 것인가. 참담한 심정으로 침대에 누워, 이곳에 싸버리겠다는 각오로 온몸의 힘을 뺐다.


새벽 1시 13분. 마음을 비운 나머지 졸음과 씨름을 하던 그때, 마침내 신호가 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소변. 역사적인 소변. 저에게 그런 관은 필요 없습니다,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소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고, 몇 시간 간격으로 찾아오는 신호에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매우 기꺼이, 매우 기쁘게.






맹장터진이야기, 열 번째 (완결)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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