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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런 Aug 27. 2019

맹장 수술, 그 이후

맹장터진이야기, 열 번째 (완결)

맹장터진이야기, 아홉 번째 에서 계속..




*매우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을 묘사했지만, 일상적인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Day 24: 화요일 (수술 이튿날)

생각보다 복근을 안 쓰는 움직임이 없더라. 매 순간 배가 아팠다. 수술 후, 다시 하루 동안 금식하며 두 종류의 항생제와 위 보호제 그리고 수액을 쉬지 않고 맞았다. 입안을 맴도는 익숙한 약 내음. 밥은 언제쯤 먹으려나. 그 와중에 먹는 생각.


특별히 아프거나 불편하신 건 없죠?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아침, 의사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이제 좀 걸어 다니세요. 점심은 미음 먹고, 저녁엔 죽을 드셔보시죠. 그럼 오후에 또 뵙겠습니다. 아 참, 가스는 아직이죠? 성공적으로 방광을 비워낸 나에게 닥친 새로운 미션.


홀로 남겨진 병실. 넷플릭싕을 하던 중 엉덩이에서 들려오는 소리. 피-슉. 이것은 가스인가 기분인가. 이 정도는 무효겠지? 다시 시간이 흘러 아홉시 9분. 붑붑. 이것은 방귀가 확실하다! 가볍게 두 번째 미션 성공. 더럽게 기분 좋음. 아홉시 11분. 브룹. 이제 그만하자.


점심으로 나온 미음은 벽지를 붙일 때 쓰는 풀처럼 생겼지만 맛이 괜찮았다. 먹는다는 것 자체가 행복. 이제 몸을 조금 움직여봐야겠다 싶어, 링거대를 밀며 밖으로 나갔다. 병실 앞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데 의사 선생님이 지나가다 말을 거셨다. 일 하시는 거 아니죠? 네, 놀고 있어요. 시키는 대로 잘하셔서 아마 별일 없으면 내일 퇴원하실 거예요.


선생님은 옆에 있는 간호사님과 나를 번갈아 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난주에 수술받았던 분이 오늘 왔다 갔는데, 나한테 거짓말했다고 막 따지는 거예요. 2박 3일만 입원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분은 열이 펄펄 나가지고 5일 만에 퇴원했거든요. 심호흡도 안 하고, 기침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더니. 그래서 제가 그랬죠. 오히려 환자분이 나한테 오점을 남겼다고.


다시 병실로 돌아와 넷플릭스를 보는데, 수액이 다 떨어져서인지 팔목에 꽂힌 튜브 안으로 피가 역류하길래 간호사실에 갔다. 일단 맞기로 한 건 다 맞으셨는데, 이따가 저녁때 아프시거나 하면 진통제를 놓아야 하니까 이건 남겨둘게요. 핸즈-프리. 바늘은 남았지만, 자유를 되찾은 나의 두 손.


저녁때 아내와 부모님이 찾아오셨다. 맹장이 터졌는데 왜 바로 수술을 하지 않은 건지, 수술은 잘됐는지, 퇴원은 언제 하는 지. 여차여차하여 2인실을 선택했는데 이틀째 혼자 쓰고 있어요. 역시 머리를 잘 쓴 것 같아요.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눈빛으로 혀를 차며 바라보는 부모님. 그 와중에 몰래 빵을 먹었는지 입가에 생크림을 묻힌 아내.


엉뚱이 아들의 안부를 확인한 부모님이 떠난 후, 아내와 단둘이 병실에 남았다. 제발 웃기지 말라는 내 말에 까르르 웃어버리는 복통유발자 그녀. 소변과 가스를 뿜어내기 위해 애쓴 이야기를 전하며 웃음과 고통 그리고 눈물, 인생의 압축판을 경험하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전원 3초간 침묵. 누구시죠? 제 배우자입니다.


처음 뵙는 가족분이라서 당황했네요. 줄곧 혼자 있어서 내가 아직 미혼인 줄 알았다는 선생님. 다 들으셨겠지만, 수술은 잘 됐고요. 어제 오셨으면 사진을 보여드렸을 텐데, 라며 갑자기 폰을 꺼내는 선생님. 아, 여기 한 장이 남아 있네요. 그은 아내에게 수술 전 내 뱃속 풍경을 보여주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셨다. 여기 부어있는 부분이 충수돌기인데, 이걸 제거한 거예요. 그럼, 맹장은 아직 배 속에 있는 거예요? 네, 맹장은 떼면 안 되죠. 흔히 맹장염이라고 하고, 맹장이 터져서 제거한다고 하는데 이 충수돌기를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자꾸 승모근이 아프다는데, 왜 그런 거예요? 복강경 수술을 하면 그러실 수 있어요. 우리 배가 원래 진공상태거든요. 그래서 수술을 하려면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가스를 주입하는 거죠. 수술이 끝나면 일부는 빼내는데 남아있는 가스가 횡격막을 자극해서 승모근이 아플 수 있어요. 남아있는 가스가 다 빠져나가면 통증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겁니다.




Day 25: 수요일 (퇴원)

아침에 밥을 먹었다. 일상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밥 다운 밥을 먹는 것이 바로 일상 아닐까. 당연히 여기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것들.


원무과에서 수납을 마치고, 회사와 보험사에 제출할 서류를 챙긴 후 병원 1층으로 내려갔다. 집에 가시는 거예요? 주차 타워에서 차를 꺼내어주고 반갑게 환송해주는 아저씨. 네, 감사합니다!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뱃속이 쩡- 울렸지만 큰 탈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수술 후 3일째 대변을 보지 못하여 조금 불안하고 많이 찝찝했지만, 소변이 그러하였듯 때가 되면 신호가 오겠거니 잠자코 기다렸다.


저녁 일곱 시 오십 분. 장을 비우는 데 성공! 기념으로 하겐다즈 쿠앤크 반 통 뚝딱.




Day 28: 토요일 (외래 진료)

꿰맨 부위는 잘 아물고 있어요. 다음 주에 초음파로 배 안쪽에 수술한 부분도 한 번 보시죠.


Day 32: 수요일 (외래 진료)

초음파 결과를 보니까, 수술 부위가 좀 부어있긴 한데 당분간 조금 조심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럼 혹시 달리기해도 되나요. 천천히 해보세요. 꿰맨 자리에 소독하고 거즈 붙여드릴 텐데, 이건 오늘 저녁때 떼셔도 됩니다. 샤워하셔도 되는데, 너무 막 긁거나 그러진 마시고요.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네, 당연하죠. 수술받기 전에도 그렇고, 받고 나서도 그렇고 계속 일을 엄청 열심히 하시던데.. 혹시 무슨 일 하세요?


저.. 회사원이요..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들

1. 아프면 병원에 가자

비타500 한 병 마시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박카스 한 병 마시면 되던 땐 지났다. 바야흐로 30대.

2. 귀찮아도 전문병원에 가자

잔병 키워 큰 병 된다. 비싸긴 하지만 확실히 검사받고 빠르게 치료받는 게 훨씬 낫다.

3. 실비가 있어서 다행이다
평생 병원을 안 가서 그 흔한 실비 보험 하나 없었는데, 작년에 들었던 보험 덕을 톡톡히 봤다.

4. 신변정리를 잘해두자
내일이 오늘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죽을 때까지 실감은 안 나겠지만, 조금씩 짐을 줄여보자.

5. 뱃살 좀 빼자
수면 상태로 배를 째더라도 덜 부끄럽게. 구멍 난 배를 꿰매더라도 덜 뒤틀리게. 바지가 터져도 덜 부끄럽게.

6. 술을 줄이자
아프고 나서 얼굴빛이 깨끗해졌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달라진 것이라곤 항생제 많이 먹고, 금주한 것뿐인데.

7. 휴가 때는 일을 하지 말자
월급을 받아보니 눈물이 난다. 유급휴가도 그렇지만, 무급휴가 땐 진짜 절대 일 안 할 거야!








맹장터진이야기 ㄲㅡ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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