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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런 Sep 17. 2019

엉덩이는 무죄

항문터진이야기 (上)




*특정 질환과 치료에 관한 글이지만, 노골적인 표현으로 인해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체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뉜다. 어느 곳이든 병들거나 다칠 수 있는데, 원인과 치료법은 각양각색이겠으나 아플 경우에는 전문적인 상담을 받고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슬프고 이상하다.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딱히 없고, 굳이 꼽자면 뿌리 없는 수치심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어떤 아픔도 부끄러움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내치핵 투병기이다.




첫 번째 진료

맹장 수술을 앞두고 외래 진료를 받은 날(Day20).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선생님, 저 하나 더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네, 물어보세요. 치질 수술은 얼마나 걸리나요? 의사 선생님은 빙긋 웃으며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한 번 보는 게 훨씬 빠르니까, 라며 커튼을 쳤다.


자, 벽 보고 옆으로 누우시고 바지랑 속옷을 좀 내려주세요. 무릎을 가슴으로 바짝 끌어올리시고요. 갑자기 옷을 잃은 엉덩이 위로 수건이 놓였다. 여기 좀 도와주세요. 의사 선생님의 부름에 간호사님이 들어왔다. 어, 이 환자분은.. 흠칫 놀라는 그녀. 맹장이 터진 환자가 갑자기 엉덩이를 내밀고 있으니 놀랄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오신 김에 보기로 했어요. 준비 좀 도와주세요.


자, 긴장하지 마시고 힘을 빼보세요. 조금 차갑습니다. 비수면 대장내시경 맛보기가 있다면 이런 것일까. 힘을 주는 것과 달리 힘을 빼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카메라가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에 힘이 솟았다. 힘이 들어가고 불편한 게 당연한 거예요. 그래도 힘 좀 빼보세요.


어느덧 내 발밑에 모니터가 놓였다. 친절하게도 실시간으로 설명해주는 선생님. 자, 여기 보이시죠? 여기가 항문 입구예요. 여기가 원래 자연스럽게 조여들어야 하는데, 이 부분이 많이 부어있어서 그렇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출혈도 있고, 지금처럼요. 순간 카메라 윗쪽으로 피가 흘렀다.


보니까 아주 심하진 않고, 내치핵 3기 정도예요. 일단 맹장 수술부터 잘 받으시고, 나중에 치료받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순식간에 지나간 나의 첫 항문 진찰. 모르는 남녀 앞에서 엉덩이 아니, 항문을 노출했지만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런데 이건 진짜 아파요. 맹장 수술보다 아픈가요. 네, 2~3주 정도는 정말 아프실 거에요. 갑자기 너무 받기 싫어졌다. 그래도 수술 만족도는 굉장히 높은 편입니다. 네..




수술 전 검사

맹장 수술 때 병가를 많이 써서 월급을 무진장 잃었다. 이번엔 같은 슬픔을 맛보지 않기 위해 연휴를 이용해 수술을 받기로 했다. 추석 이틀 전, 수술 전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들렀다. 한 달 만에 만나는 의사 선생님. 제가 수술에 대해 설명해 드렸었나요? 아뇨, 그냥 간단히만 알려주셨어요. 선생님은 맹장 수술 때처럼 종이와 펜을 꺼내 수술 과정과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관해 설명했다.


혹시 재발할 수도 있나요? 재발했다는 사람들을 많이 보셨을 텐데, 꿰맨 부분이 약간 뜯어져서 그렇게 느끼는 분들이 있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재발하는 경우도 있지만, 10년 넘게 잘 지내는 분들도 있어요. 그렇게 될 수 있게 수술을 잘해야죠. 깨끗하게, 예쁘게.


초음파에 이어 소변/혈액 검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원무과에 들렀다. 명절 연휴에는 수납할 수 없어 미리 일정 금액을 결제한단다. 할부는 몇 개월로 하시겠어요? 일시불로 해주세요. 내일 모레 병동으로 바로 가셔서 입원 수속 밟으시면 됩니다.




수술 하루 전

점심 저녁은 대충 먹었다. 추석 연휴 하루 전이라 그런지 오후엔 사무실이 다소 썰렁했다. 연차나 반차를 쓴 이도 많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평소보다 조금 일찍 사무실을 나섰는데 다른 부서의 팀원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 어디, 가세요?
- 집에 갑니다.
추석에 어딜 가는지 묻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 굳이 모른척했다.
- 아뇨, 연휴 때.
재차 묻는 그에게 뭐라고 말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간단히 답했다.
- 저는 입원해요.
당황한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두루뭉술 다시 물었다.
- 아, 심각한 건 아니죠?
- 네네. 운동가시나 봐요.
더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기 위해 그의 운동 가방을 가리키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일곱 시 반. 집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서 받았던 관장약을 먹었다. 정말 맛없어 보이는 용기에 담겨있었지만, 의외로 상큼했다. 170mL 원샷. 약을 다 드신 후에는 물을 많이 드셔야 해요. 간호사님께 받았던 메모를 보니 약을 먹은 후 두 시간 내에 1L 이상의 물을 마시라고 적혀있었다.


사고 싶은 책이 있었는데, 카페에 엄청 싸게 올라왔어. 아내의 말에 어디로 가면 되는지 물었다. 조금 멀어, 의정부야. 지금 시각 8시 45분. 두뇌풀가동. 지금이 아니면 안되겠다 싶어 바로 출발. 9시 20분, 한 시간 만에 목적지 도착.


판매자에게 전화를 걸자 지금 외출 중이라며 난색을 보였다. 이렇게 일찍 오실줄 몰랐어요. 제가 열 시 조금 넘으면 집에 돌아갈 것 같아요. 내 사정을 상세히 알려줄 순 없어서, 매우 멀리에서 왔다고만 말했다. 그럼 포장해놓은 것만 가져가셔야 할 것 같아요. 돈은 집에 할머니한테 주시면 돼요.


카카오페이로 보내 달라고 해놓고, 정작 카카오페이를 쓸 줄 모르는 판매자 덕분에 20분 지연. 결국 은행 계좌이체. 책을 실은 후, 챙겨갔던 생수 1L를 나눠마시며 집에 도착. 잘 견뎌준 나의 몸속 친구들에게 감사.

두 시간 동안 마셨던 물을 5분 만에 모두 배출하니 조금 허기가 느껴졌다. 열두 시부터는 물도 마시지 말라고 했으니깐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밤 11시 40분. 포도 두 송이 폭풍흡입.






항문터진이야기 (中)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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