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앨런 Oct 24. 2019

다시 터진 엉덩이 (세상에..)

항문터진이야기 (中)

항문터진이야기 (上) 에서 계속..



*특정 질환과 치료에 관한 글이지만, 노골적인 표현으로 인해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술 당일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아침. 거리는 한산했다. 익숙한 거리의 낯설지 않은 횡단보도. 멍 때리고 걸어도 도착하는 집처럼 병원에 도착했다. 맹터남 시절이 떠오르며, 데자뷰같이 이어지는 입원 수속. 연휴인지라 보충인력이 동원되었는지 낯선 간호사님과 간호인분들이 계셨다.


사흘간 내가 머물 곳은 가장 안쪽에 있는 2인실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병실에 들어서니 문 쪽 침대에 환자 한 명이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2인실 독방이 아니군. 그런데 안쪽 침대에도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저, 자리가 정리되지 않은 것 같아요. 간호사실로 돌아가 물어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 답했다. 일손이 많이 부족한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다시 병실로 돌아가 짐을 풀고, 환복 후 자리에 누웠다. 원래 오후에 수술하기로 했지만, 일찍 입원하여 일정이 조금 앞당겨졌다. 한 달 만에 다시 수술을 받게 되다니. 착잡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의사 선생님은 늘 그랬듯 빙글빙글 웃으며 나를 맞았다. 자꾸 보니깐 왠지 얄미운 웃는 상. 어서 오세요. 그래도 두 번째라 낯설지 않으시죠. 요상한 인사를 옆에서 듣던 간호사님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었다. 이 방은 처음이시죠. 아, 그렇구나 저번엔 저쪽 방이었구나. 긴장감 제로의 수술 전 토크.


설명드렸던 것처럼 오늘 수술은 하반신만 척추마취로 진행할 거에요. 자, 이쪽 보고 앉아보세요. 간호사님이 내 자세를 잡아주는 동안, 의사 선생님은 베개를 가슴에 안고 한껏 등을 구부린 나의 뒤에 앉았다. 자 조금 따끔하실 거예요. 차가운 촉감이 느껴지고, 이어서 무엇인가 내 등을 계속 문지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프지 않아 신기하다 생각할 찰나 등이 욱씬거리기 시작했다.


마취가 끝나고, 본격적인 수술의 시작.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이제 바지 벗으실게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팔을 위쪽을 하시고 엎드리세요. 한 명인지 두 명인지 보이지 않는 여러 손이 뒤쪽에서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몸을 좀 들어주세요. 응차. 한 번 더, 응-차.


차가운 공기가 엉덩이를 스친다.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손길들. 찰흙을 만지듯 엉덩이를 늘려 테이프로 고정했다. 아프지 않으시죠? 네, 괜찮아요. 이미 그것은 나의 신체 일부라기엔 너무 다른 세계에 있는 느낌이었다. 치과에서 마취하면 볼이 없어진 듯한 그런 기분일 줄 알았는데, 묘하게 달랐다. 어나더어나더레벨.


몸 일부가 떨어져 나간다. 맹장 때와는 달리 의식이 있으니, 30년 인생 최초 눈뜨고 살 베인 추억을 갖게 되겠군. 문득 십수 년 전 라섹 수술이 떠올랐다. 눈뜨고 망막 베인 추억. 그땐 눈꺼풀을 활짝 열어놓았고, 지금은 엉덩이를.. 한껏 마취된 하반신은 나의 뒤편에서 아득히 멀어지며 천장 어딘가 부유하는 듯했다.


이제 아랫배가 좀 뻐근~하실 거에요. 의사 선생님의 경고에 이어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몹시 불편하고 불쾌한 압박감. 입에서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좀 불편하시죠, 거의 다 됐으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의사 선생님이 괜히 미웠다.


모든 것엔 끝이 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 끝났어요. 의사 선생님은 엎드린 채 그 말을 기다리던 내 눈앞에 마침내 나와 작은 핏덩이를 들이밀었다.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 하시죠. 아, 예.. 난 그 물체에 어찌 인사해야 할지 몰랐고, 의사 선생님은 나의 그런 마음을 몰라서 우리들 사이엔 잠깐 정적이 흘렀다.


잠깐 꿈을 꾼 것처럼 난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나를 병실까지 데려다준 간호사님은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었고, 왼쪽 손목에 무통주사를 달아주었다. 가만히 둬도 계속 들어가긴 하는데, 너무 아프다 싶으면 이 버튼을 꾸욱 누르세요. 근데 또 버튼을 누른다고 막 엄청 빨리 들어가고 그러진 않아요.


의사 선생님은 조금 이따가 찾아왔다. 병실에 들어온 그는 나와 또 다른 환자를 번갈아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여기가 선배님이시네. 옆자리 환자는 나보다 하루 일찍 치핵제거수술을 받았단다. 하루 지나니까 좀 괜찮으시죠. 네, 어젯밤에는 잠을 못 잤어요. 그의 어젯밤이 다가올 나의 첫날밤 일터. 불안한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사 선생님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저는 지금 시골에 내려가 봐야 해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당직 선생님들이 계시니까 걱정하진 마시고요. 다음 주 외래진료 때 뵙죠.


시간이 흐르며 통증이 시작되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여러 권 챙겨왔지만, 책은커녕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오후에는 근무 교대가 있었는지 아침과 다른 간호사님이 찾아왔다. 커튼을 열고 내 얼굴을 보더니 흠칫 놀라는 그녀. 차트와 나를 번갈아 보며 말을 더듬었다. 어.. 이번엔 다른 곳이 아파서 오셨네요.. 그러게요. 제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좌욕해 보셨어요? 안 해보셨구나~. 여기 설명은 다 있는데, 온도 같은 경우에는 손등을 대봤을 때 뜨겁지 않을 정도가 좋아요. 여기 있는 거즈는 좌욕 후에 엉덩이에 끼워 주시면 돼요. 맑고 경쾌한 목소리. 간호사님은 좌욕법에 이어 좌욕 후 엉덩이 사이에 거즈를 끼우는 방법을 몹시 명랑하게 설명해주었다. 손가락을 접어 엉덩이를 형상화하는 놀라운 친절까지.


저녁때엔 당직 선생님이 찾아와 수술 부위를 꽉 막고 있던 거즈를 제거해주셨다. 수술은 아주 잘되었네요, 그럼 푹 쉬세요. 물론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 어떠한 자세에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 조금씩 끊임없이 몸을 뒤트는 사이 식은땀이 흘러나와 찝찝함이 배가되었다.


무통주사로 지울 수 없는 통증과 함께 잠 못 이루는 첫날밤이 깊어갔다.




수술 다음  그리고 퇴원일

맹장수술 때엔 복근이 얼마나 많이 쓰이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면, 이번엔 괄약근이 얼마나 많이 쓰이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복근과 달리 괄약근은 사용량을 조절하기 몹시 까다로워, 침대에 누워 자세를 고치는 것만으로도 큰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다음날에는 또 다른 의사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아주 예쁘게 잘 말려 올라갔네요. 묘한 칭찬과 함께 진찰은 금방 끝났다. 불쾌하고 불편한 통증이 영 가시지 않았지만, 이틀이 지나 퇴원을 했다. 연휴의 끝자락, 한산한 거리. 좌욕기를 손에 들고 버스를 타게 될 줄이야. 다행히 사람은 적었다.


변 보시기가 아프고 불편하실 수가 있는데, 조금 팁을 드리자면 좌욕을 하면서 신호가 왔을 때 자연스럽게 같이 해보세요. 그럼 조금 편하실 거예요.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엉덩이로는 받아드리기 어려운 조언이었다. 리터럴리 똥물 위에 앉아 있으란 말인가?


병원에서 보낸 2박 3일 동안, 화장실 가기가 두려워 밥을 눈꼽만큼 먹었던 나. 하지만 평생 대변을 멀리할 수는 없는 법. 집에 돌아와 용기(?)를 내보았다. 어차피 찢어진 부분이 다시 찢어지기밖에 더 하겠는가.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수술을 하진 않았을 테니.


응..차! 으아앜!!


마취하지 않고 수술을 받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여운이 길고 아주 몹쓸 통증이 밀려왔다. 변을 보신 후에는 꼭 좌욕하십시오. 간호사님이 주신 안내서에서 읽었던 문장이 떠올라, 재빨리 좌욕기에 앉았다. 서럽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렇게 나의 2019년 추석이 끝났다.




수술 다음  그리고 다음다음주

앉으나 서나 온통 신경이 날카로운 나날이 시작되었다. 회사에 몇 명은 이미 나의 상태를 알고 있었고,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퇴사자에게 염가에 산 스탠딩 데스크. 엉덩이가 아프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허리 건강에도 좋(은 느낌이)다. 대신 종아리와 무릎이 몹시 아프다. 이것도 다 적응되겠지.


보통 수술 후에 바로 일하시는 분들이 회복이 빠르더라고요.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수술 부위가 간지러울 수도 있고 평소보다 자주 변의가 느껴질 수 있는데, 그때마다 화장실에 가지 말고 조금 참아보세요. 너무 자주 변을 누시면 상처가 빨리 아물지 않을 수 있어요. 직장인들이 회복이 빠른 이유가 화장실을 자주 못 가서라니. 서글프다. 애초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질환이라던데.


수술 후 첫 경과 진찰은 제대로 본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금방 끝났다. 상태가 아주 좋네요. 변은 보셨어요? 특별히 피가 많이 나거나 그런 적도 없으시죠? 네, 그런데 계속 아파요. 통증은 이제 점차 가라앉을 거예요. 그럼 다음 주에 보시죠.


통증은 선생님의 말과 달리 점차 가라앉지 않고, 어느 순간 훅 줄어들었다. 마침내 살맛 나는 세상이 펼쳐지는가. 하지만 두 번째 경과 진찰 이틀 전 밤부터 갑자기 다시 통증이 심해졌다. 이상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불길한 예감은 왜 빗나가질 않나. 두 번째 진찰은 첫 번째와 달리 꽤 시간이 걸렸고, 선생님은 평소와 달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수술 부위 사진을 보여주며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절제하고 꿰맨 부분 중에 이 부위가 뜯어졌네요. 지난주에 상태가 아주 좋아서 이제 오늘 보고 별일 없으면 다음다음주에 마지막으로 보자고 하려고 했는데..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기 부어오른 부분이랑 여기 뜯어진 부분을 똑 떼어내면 되는데..
 

다음 주에 언제 오실 수 있으세요?






항문터진이야기 (下) 에서 계속..


이전 11화 엉덩이는 무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