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앨런 Sep 23. 2019

우리가 돈이 없지 컨셉이 없냐

파이콘2019 부스 & 굿즈 제작기



매년 참석했지만 올해에는 처음으로 부스를 만들기로 했어요.


5월의 어느 날, CTO가 우리 팀 디자이너K와 나를 소환했다. 그렇군요.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그거였군요. 컨퍼런스의 이름은 파이콘pycon. 파이썬python이라는 언어와 관련된 글로벌 행사인데, 나라마다 열리기 때문에 규모가 막 미친 듯이 큰 행사는 아니다. 그래도 총 2천여 명이 참석한다고 하니, 아기자기 귀여운 소규모 모임 역시 아니다. 뭐 어쨌든, 나와 K를 소환한 이유는 부스와 굿즈(aka홍보물) 그리고 이벤트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괜찮으실까요? 허허, 괜찮지 않다면 안 해도 되나요. 그건 아니죠. 일정이 언제인가요? 8월 17~18일입니다. 그럼 아직 여유는 조금 있네요. 일단 행사에 대해 전혀 모르니깐 조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그다음에 어떤 것들이 필요할지 함께 논의해보시죠. 무작정 부스나 굿즈, 이벤트를 준비하면 그냥 돈 낭비가 될 확률이 높잖아요. 근데 우리 돈도 없잖아요. 그렇죠. 얼마나 쓸 수 있는지도 CFO님에게 미리 확인 좀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후 우리는 거의 매주 만났다. 첫 번째 회의에서 행사에 관한 기본 정보를 들은 후 나의 첫 질문.


근데 부스를 왜 만들어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참가했지만 부스를 꾸린 적은 없었다. 파이콘은 기본적으로 비영리단체의 컨퍼런스로 기업 스폰서십이 행사의 주요 재원이다. 스폰서십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부스를 돈 주고 파는 거다. 이번에 우리가 참가한 부스는 가장 작은 부스였지만, 생각 없이 막 쓸 정도로 적은 돈은 아니다. 올해도 몇 명의 개발자들이 발표자로 참석하지만, 추가로 돈을 내면서 부스를 만드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건 당연히 채용이죠.


개발자 채용. 비단 우리뿐 아니라 많은 회사의 과제겠지만, 특히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많이 부족한 우리 회사 같은 스타트업은 회사를 알리고 동시에 좋은 인재를 만날 수 있는 (파이콘 같은) 기회가 몹시 귀하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 목표를 잊지 않도록합시다. 컨퍼런스에 회삿돈을 쓰면서 참가하는 목표는 채용이니까, 앞으로 우리가 준비하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최우선 기준은 그거에요.


그럼 채용 당하는(?) 입장에서 우리 회사의 장점을 말해볼까요. 일동 침묵. 우리 회사에 관심이 있을까요. 이어지는 침묵. 그럼 들어는 봤을까요. (울지마.. 고개 들어..) 우리가 못나서 그런 것도, 뭔가 잘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스타트업은 인지도가 떨어지고, 금융이라는 카테고리는 (솔직한 우리 개발자들에 의하면) 젊은 개발자들이 피할 순 있어도 선호하는 분야가 아니다.


해답을 찾기 위해 최근 입사자들이나 인턴에게 물었다. 어떤 점에 끌려서 지원하셨나요? 들어와서 보니 어떤 점이 좋은가요? 금융은 잘 모르겠지만 개발문화가 정말 좋아요. 개발문화라니.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CTO와 회의에 참석한 개발자들을 쪼았다. 자랑하고 싶은 개발문화에 대해 좀 알려주세요.


회사에 관해 물었을 때 침묵을 지켰던 모든 이들이 입을 열었다. 내가 몰랐던 것들과 들어도 잘 이해 안 되는 것들이 많았지만, 우리 개발팀은 자치적으로 많은 것들을 실행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들은 모든 구성원이 만족하는 이유이자, 최근 입사자들이 관심/호감을 느끼고 지원하는 동기가 되는 요소였다.


개발문화를 팔아야겠네요.


우리가 행사에 참여하는 이유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정했으니, 마지막 숙제가 남았다. 그럼 컨셉에 대해 말해볼까요. 컨셉이라는 말에 다시 찾아온 침묵.


회의 참석자 대부분이 나에 기대하는 것은 이런 타이밍에 침묵을 감탄으로 바꿔버리는 번뜩이는 아이디어! 예상치 못한 한방! 그리고 K에게 원하는 것은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멋진 아트웤일텐데.. (애초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더라도) 그런 게 뚝딱 나올 리가 없다.


디자이너에겐 레퍼런스를 찾든 뭘 하든 간에 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열쇠key가 필요하고, 모든 것을 완성하는 그 순간까지 작업물의 알맹이가 되는 구체적 내용contents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만들어야 하는 나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의 기대에 찬 눈빛뿐. (헛소리라도 좋으니까, 아무 말이라도 해줘..)


생각을 오래 한다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는다. (보통 그 반대더라..) 머리를 깨끗이 비우고, 이미 정리된 내용을 되짚어보았다. 우리의 목표는 채용. 회사 이름으론 어그로를 끌 수 없다. 보상이나 복지가 꿀리진 않지만, 미친 클라스라고 할 순 없다. 개발문화를 얘기하고 싶지만 무작정 '개발문화개좋아!' 말할 수는 없고 (심지어 그러더라도) 먼저 눈길을 사로잡아야 한다. 순간 머리에 스친 생각.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면 어떨까.


그냥 "개발자 뽑으러 왔다"고 하면?


부스에 커다랗게 붙이는 거죠. 누구누구입니다, 이런 거 하는 회사에요, 여차여차하여 좋아요, 이런 얘기 대신에 그냥 솔직담백하게 '개발자 뽑으러 왔습니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부스는 아무 데도 없을 것 같은데. (없겠지..) 회사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외치고, 로고 하나라도 더 크게 보여주려는 게 정상(?)이지. 하지만 우린 그렇게 하면 답이 없으니까. 이왕 까놓고 말하는 거 조금 더 와닿게, 구체적으로.. '개발자 세 분 모시러 왔습니다.' 어때요?


일단 반응은 좋았다. 난 기세를 몰아 회의에 참석한 개발자들을 다시 쪼았다. 누군가 우리 부스에 오고, 지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 궁금할 것 같아요. (숙제 나갑니다. 빨리 빈칸 채워서 제출해주세요.) 


1. 내가 셋 중의 하나가 되고 싶은가?
→ 자랑하고 싶은 개발문화에 대해 자세히 적어주세요.
2. 내가 셋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까?
→ 지원자가 갖춰야 하는 기본 요건에 대해 알려주세요.





'개발자 3명 뽑으러 왔다'고 말하기로 했다지만,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는 결정된 것은 없었다. 그 와중에 주최 측에서 행사 부스 배치도를 보내왔다. 우리 자리 되게 좋네요. 접근성도 좋고, 부스 옆을 개방할 수도 있겠네요. 근데.. 바로 옆 부스가 라인LINE이네요?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 라인 보러 왔다가 홀린 듯이 들어올 수 있도록. 적어도 라인 부스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서는 곳이 되지 않도록. 메시지를 조금 더 임팩트 있게(쉽고, 인상적으로) 전달할 방법이 없을까. 이번에도 머리를 깨끗이 비우고 (텅텅텅텅) 방법을 찾아보자.


1. 낮은 인지도 → 단기간에 극복할 수 없다.
2. 적은 관심/흥미 → 업종을 바꿀 수 없다.
3. 부족한 예산 →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오뚜기 3분 요리 → 백엔드 3분 채용


패러디. 이미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이용하여 메시지를 쉽고 재미있게 표현하는 방법. 국민 대다수가 아는 '오뚜기 3분 요리' 이미지를 사용해보자. '개발자 3명 뽑으러 왔다'는 메시지를 '백엔드 3분 채용중'으로 그려봤다. 머릿속에 걱정과 아쉬움(뭘 했다고 벌써?)이 솟구쳤지만 잘 풀릴 것도 같았다.


딱 내일까지 더 생각해보고 더 좋은 게 없으면 이걸로 합시다. 나는 회사 앞 편의점에서 오뚜기 3분 제품들을 사 와서 K에게 건넸다. (답정너st. 나 때문에 늘 고생하는 K에게 늘 감사..) 아예 패키지를 만들어서 하고 싶은 얘기를 그냥 다 때려 넣자. 어설프면 나온 웃음도 쏙 들어가니까, 깨알 같은 디테일을 챙겨보자.


K는 일정과 공정, 견적 등 패키지 및 굿즈 제작에 필요한 기본 정보를 뚝딱 정리해서 알려줬다. 파이콘 전체 참가자의 절반에게 우리를 알린다는 것을 목표로 패키지는 1,000개를 준비하기로 했다. 예산 안에서 컨셉을 유지하면서 빈티 나지 않는 구성으로.


1. 패키지: 컨셉을 전달하는 아이콘 + 개발문화를 설명하는 지면 + 구성품을 담는 역할
2. 리플렛: 전반적으로 부족한 회사소개를 보강하는 지면 + 컨셉을 유지하는 역할
3. 스티커팩: 소소한 재미 + 잔잔한 회사 홍보 + 컨셉을 유지하는 역할
4. 쿠폰: 회사/서비스 홍보 + 돈 대신에 당장 줄 수 있는 금전적인 혜택
5. 볼펜: 컨퍼런스에서 쓸 수 있는 실용적인 아이템 + 구성을 알차 보이게 하는 역할


자, 이제 미끼를 준비합시다.


(인지도가 낮은 회사가) 인상적인 굿즈를 준비하더라도 나쁘게 말하면 그냥 홍보물이다.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제작했지만 (제발 집까지만 데려가 주세요..) 부스에 들어오고 머물도록 하는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바로 이벤트. 거의 모든 부스에서 이벤트를 진행할 텐데, 우리는 뭘 해야 할까요? 아니, 뭘 걸까요?


1. 참여하고 싶어야 한다. → 유입량
2. 참여하기 쉬워야 한다. → 참여율
3. 운영하기 편해야 한다. → 회전율


컨퍼런스를 찾은 사람들이 인지도가 낮은 회사의 작은 부스에 방문해서(1차 수고) 이벤트에 참여하도록(2차 수고) 하려면, 이벤트가 그 자체로 미친 듯이 재미있거나(거의 불가능..) 겁나 갖고 싶은(대체로 비싼) 상품을 걸어야 한다. 다시 예산 문제.


내가 사긴 돈 아깝고, 받으면 좋은 거..


조금이라도 비싼 것을 주려면 한 명한테 몰아줘야 하는데, 딱 한 명한테 준다고 하면 참여율이 떨어질 것 같아요. 확률적으로 받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그래도 되게 갖고 싶은 거라면 상관없는데 우리는 돈이..(눈물 한 모금) 개발자분들은 각자 내 돈 주고 사긴 싫지만, 받으면 완전 땡큐인 것들을 말해주세요.


개인취향토크가 한창 이어졌다. 너무 개인적인 것들을 제외하니까 헤드폰과 커피로 좁혀져서, 'BOSE QC 35 II'(1명), '스타벅스카드 10만원'(6명)을 상품으로 결정했다. (사실 1등에게는 해피해킹 키보드를 주려고 했는데, NO재팬 물결로 인하여 교체..)


그냥 랜덤 추첨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더 머리를 굴려보기로 했다. 애초에 회사소개에 대한 욕심은 버리기로 했다지만, 이벤트에 살짝 녹일 수 있지 않을까? 마침 '누적 투자금액 5천억원'이라는 뉴스거리가 있었다. 이벤트 전에 기사를 배포하고, 5천억원 달성 시점을 맞추는 문제를 내보자.


숫자 4개만 찍으면, 끝.


구글 서베이를 사용하여 간단하게 이벤트 참가 페이지 제작. (슬쩍 숨은 의도: 이벤트 페이지를 그냥 구글 서베이로 만들다니.. 이 팀은 개발 리소스를 허투루 쓰지 않는구나!) 숫자 6개를 맞추면 되는데 2개는 기사를 통해 알려줬으니까(기사 강제 노출 효과) 숫자 4개만 맞추면 이벤트 참여 끝.



설마 맞추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두 명이 정확하게 맞췄다. (뭐야.. 무서워..) 다행히 동점자가 있다면 답안 제출 순서로 결정하겠다고 명시해두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맞춰놓고도 2등이 된 사람 뿐 아니라 고작 1분 차이로 놓친 이들도 다섯 명이나 있었다.





막판엔 역시 가내.. 아니, 사내수공업. 1천개 패키지에 굿즈를 담고 포장하는 작업은 순수한 땀방울의 결정체. 부스에 설치할 현수막은 3M가 넘어서 사무실에서 현장까지 직접 운반하기도 했다.

막판 사내수공업 풀가동 현장..
3M 넘는 현수막을 직접 운반해준 팀원들.. (세그웨이 무엇??)
부스 설치 끝! (허락을 받기 귀찮아서 모두 모자이크.)





의식의 흐름대로 준비과정을 정리해봤는데, 어쨌든 생각보다는 순탄했다. (뭐든지 지나고 나면 아름다훠..) 재고가 남거나 많이 버려질까 걱정했던 굿즈 1,000개는 금방 동났고, 이벤트 역시 600명이나 참여했다. (전반적으로 우리 부스에 대한 관심도 높고, 호응 역시 좋았단다.)


물론 최종목표는 채용이지만, 그건 단박에 해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세션 발표자들의 마지막 장표에도 깨알같이 '3분 채용중' 심볼을 박아놓은 K.


모두 고생하셨어요!


사실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던 것은 이 글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모든 사람 덕분이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도 고생합시다.)


한 명을 특별히 꼽자면, 행사를 앞두고 맹장이 터져서 입원한 나(aka맹터남) 덕분에 마무리하는 시기 홀로 야근을 밥 먹듯이 한 우리팀 디자이너K. (그렇지만 나도 병원에서 일했다구.. 병가는 무급인데.. 또르르..) 고마우니까, 앞으로도 파이팅 합시다?!

행사 다 끝나고 찍은 컨셉샷
컨셉샷22
컨셉샷333




기타 느낀 점 (숙제)  브랜드 identity 절실 (급구)







ㄲㅡㅌ.


작가의 이전글 이왕 하는 1이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