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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런 Jan 14. 2020

그런데 우리, 회의 중인가요?

시도 때도 없이 말을 시키는 당신 덕분에, 요즘 부쩍 음악을 많이 들어요



1_

동료가 있었다. 말은 조금 거칠게 해도, 은근히 꼬박꼬박 대꾸해주던 사람. 갓 입사한 나는 숨 쉬듯 질문을 던졌고, 신입 딱지를 뗀 후에도 불쑥불쑥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마침 그는 내 옆에 앉았고, 우리 사이에는 파티션이 없었다.


2_

어느 날 회사에 대대적인 자리 이동이 있었다. 우리 부서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 동료는 나와 팀장 사이에 앉았다. 여전히 우리들 사이에 파티션은 없었고, 나는 뭔가 떠오를 때마다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말을 걸었다.


3_ 

자리를 바꾼 얼마 뒤, 팀장은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돌려 나와 동료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시선을 빼앗긴 우리. 그 모습을 본 팀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앉으니까 너무 좋다. 이렇게 고개만 돌리면 둘한테 동시에 얘기할 수 있네."


4_

그간 내가 저질렀던 만행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동료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아, 맞다. 그거 있잖아." 팀장이 입을 뗄 때마다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야 했고, 그런 팀장의 모습에서 내가 겹쳐 보였다.


5_

다독가인 동료의 책상엔 언제나 책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읽은 책, 읽다가 내려놓은 책, 언젠가 꼭 읽고 싶은 책, 읽을까 했지만 영 손이 안 가는 책. 그와 팀장 그리고 나와 그 사이에 쌓인 책의 높이를 비교하며, 나는 쓸데없이 안도했다.

6_

동료와 난 때로 함께 웃었고, 종종 토론에 열을 올렸지만, 자주 서로를 외면했다. 들렸지만 안 들은 것, 듣고 싶지 않지만 들린 것이 쌓였다. 적당히 호응하고 적잖게 귀찮아하며, 우리는 보이지 않는 파티션을 쌓았다.


7_

국민..아니, 초등학교에는 짝꿍과 함께 쓰는 기다란 책상이 있었다. 교과서 두 권을 나란히 펼치면, 거의 꽉 찰 만큼 작은 네모. 그 좁은 세계에서도 아이들은 선을 고쳐 그으며 전쟁을 치렀다. 지킬 줄만 알고, 지켜줄 줄 몰랐던 그때.


8_

파티션이 없어도 우리에겐 각자의 공간이 있다. 그 안에 나름의 호흡으로 흘러가는 각자의 시간이 있다. 파티션이 없어도 모두에겐 그것을 지킬 책임이 있다. 나의 미안한 마음이 눈치 빠른 동료에게 닿았기를, 이제라도 바라본다.




ps_

요새 에어팟프로가 너무 갖고 싶다. 노이즈 캔슬링 대박이던데..


ps(2)_

누군가 당신의 시간을 오랑캐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약탈하면, 이렇게 말해보세요.
"그런데 우리, 회의 중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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