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원을 떠나보내며, 회사에 쏘아 올린 구구절절한 상소문
벌써 1년이 훌쩍 지난, 작년 4월. 이른 아침 팀원이 DM을 보냈다.
- 앨런 님, 오늘 점심 약속 있으세요?
보는 순간 촉이 왔다. 퇴사구나.
- 안 됩니다.
- 아.. 드릴 말씀이...
하필 그날따라 진짜 점심 약속이 있었고, 그렇다고 미룰 일은 아니었기에 바로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예상대로 퇴사 소식을 전해왔다. 아쉽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터라, 응원의 말을 전하며 대화를 금방 마쳤다.
-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 안 잡으시네요.
- 에이, 그럼요. 아시다시피 저는 퇴사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한 선택일 텐데.
- 아니 그래도 팀장님이신데, 시늉이라도 하셔야 하는 거 아녜요? (웃음)
- 아.. (웃음) 잡으면 남을 거예요?
- 아뇨.. (웃음)
어쨌거나 그를 포함하여 오랫동안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준 팀원들이 떠나는 일이 잦아졌고, 아쉬운 마음에 아래와 같은 상소문(?)을 써서 회사에 공유했다.
회사와 팀원의 이름은 익명으로...
참고링크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사람의 가치는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사람을 뽑기 위해 가진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울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넷플릭스의 퇴사문화(부검메일) 그리고 파타고니아의 퇴사인터뷰에 관한 글을 읽고, 우리도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곧 퇴사 예정인 A님과 B님께 요청하여 '{회사이름} 퇴사메일'을 써보려고 합니다.
넷플릭스는 부검메일의 효과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대부분의 회사에 적용될 수 있는 내용 아닐까요?)
1. 회사의 투명성을 높인다. 공식발표가 없을 경우 사내 공포감이 조성되거나, 비밀 많은 조직이 될 수 있기 때문.
2. 조직 운영에 도움이 된다. 퇴사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공유하여,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할 수 있기 때문.
3. 위기를 예방할 수 있다. 드러나지 않은 문제(예를 들면, 특정 리더의 불공평한 평가)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
4. 직원을 붙잡을 수도 있다. 부검 메일을 쓰다가 오해가 풀리거나, 회사와 합의점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
즉, 부검 메일은 퇴사자에 대한 사내 공유가 아니라 해당 직원의 퇴사를 계기로 회사를 ‘부검’하는 기회입니다.
넷플릭스, 파타고니아의 사례를 토대로 문항을 작성해보았습니다.
1. 당신은 왜 {회사이름}에 입사하셨나요?
개인의 가치와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쓴다.
{회사이름}에서 원했던 경험에 관하여 쓴다.
2. 당신이 {회사이름}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개인의 가치와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쓴다.
{회사이름}가 충족시켜주지 못한 경험에 관하여 쓴다.
사람마다 다르게 해설할 수 있는 여지가 없도록 명쾌하게 쓴다.
3. 당신은 {회사이름}에서 어떤 것을 배웠나요?
{회사이름}에서 새롭게 배우고 경험한 것을 쓴다.
4. {회사이름}에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요?
{회사이름}가 ‘만약 이랬다면 떠나지 않았을 것’을 전제로 쓴다.
5. 당신의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먼저 퇴사자가 위 문항에 답하고, 해당 내용을 그룹장과 HR책임자가 함께 리뷰하며 아래 내용을 작성합니다.
1. 퇴사자가 회사에 기여한 것은 무엇인가요?
2. 퇴사자에게 회사가 기대한 것은 무엇인가요?
3. 퇴사를 예방할 수 있었던 조치는 무엇인가요?
4. 이후 회사에서 개선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퇴사 메일이 본 목표에 맞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아래 내용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1. 퇴사자가 원하지 않는 내용은 공개하지 않는다.
단, 명백한 위법 행위나 징계로 인한 퇴사의 경우 해당 내용을 밝힌다.
2. 퇴사자가 회사에 기여한 내용을 서술하고 충분한 감사를 표한다.
퇴사 메일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환송회 기회를 제공한다.
댓글
M님(COO) [2020.4.16]
퇴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라는 관점부터 같이 정리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질문에 퇴사가 예방되었어야 한다는 부분에 focus되는 것도 같아서요. 개인적으로 저는 퇴사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삶의 여정 속에서 {회사이름}호를 탔다가 또 내릴 때도 있을 거고 그건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요. 그래서 {회사이름}이 싫어서 떠나는 게 아닌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잘 보내줄까(farewell ceremony?), 보내준 다음에는 어떻게 같이 할 수 있을까(alumni meeting?) 등이 더 좋은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앨런 [2020.4.16]
말씀하신 부분은 위에서 인용한 두 개 기업의 사례를 기반으로 작성하며 자연스럽게 반영된 내용인데, 저 역시 퇴사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더 고민해볼게요. (예방이라는 단어의 의미상 더 부적절하게 느껴지긴 하네요.)
M님(COO) [2020.4.16]
전반적으로는 좋아요! 저 정도에서 같이 develop해보시죠.
앨런 [2020.4.20]
(저 역시 '퇴사'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에) 제가 '예방'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1. 우선 '예방'이라는 단어는 매우 회사 입장을 반영한 단어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소중한 인력의 이탈은 회사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우리 회사는 그동안 '낮은 퇴사/이직률'을 자랑했습니다. 그 이야기에 담고자 한 의미는 그만큼 사람들이 만족하며 일할 수 있는, 혹은 일하고 있는 회사라는 것이죠.
3. 그렇기 때문에 퇴사/이직이 많아질 때 우리는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회사이름}에서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것을 우리가 개선할 수 있는지 혹은 개선할 필요가 있는지 말이죠.
4. 누군가의 퇴사 외에도 직원들을 살뜰히 돌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퇴사메일은 그런 계기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고민하고 퇴사 결정을 내리기까지 아무런 이상징후를 알 수 없다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결과는 계속될 것입니다.
덧1_
퇴사율이 높아도 다니고 싶은 회사가 있고, 퇴사율이 낮아도 다니기 싫은 회사가 있습니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단순히 퇴사율을 낮추는 것보다 사람들이 다니고 싶은 회사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개선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귀~여운 이모티콘)
M님(COO) [2020.4.20]
이 내용은 모두 완전 동의합니다.
다시 보니, 굉장한 오지랖을 부렸구나... 싶네..
그래도 좋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즐겁고 생산적으로 일하고 싶다면, 더 나은 조직을 만들고 싶다면, 생각해볼 만한 주제가 아닐까?
ps.
아쉽게도 M님의 마지막 댓글을 끝으로, 해당 논의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퇴사자 2명 외에도 1명을 추가하여 총 3명의 퇴사자에게 메일을 받았지만, 해당 인원들의 그룹장이 리뷰를 작성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샘플로 활용하지도 못했다. (어물쩡 시간이 흐르고 결국 나도 퇴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