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야무지게, 더 치밀하게 내 의사를 전달하고 싶다.
어느덧 일본생활도 3년차로 달려간다. 이제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주문하는 등의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별다른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문제는 갈등상황에 봉착했을 때다.
분위기와 상황에 맞게 적절한 단어와 표현으로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현실에서는 그게 잘 안 된다. 주변의 네이티브들은 치사하게도 콘텐츠가 아닌 전달방식을 공격한다. 대놓고 면박을 주는 건 아니고, 대화 중에 표현을 고쳐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우아하고 정교하게 사람 기를 죽인다. 이렇게 되면 대화를 지속하는 것 자체가 에너지 소모다. 처음 대화를 시작한 목적은 어찌되든, 대화 자체에서 벗어나는 걸 목적으로 삼게 된다. 자연스럽게 결론은 상대방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나 버린다.
이런 자잘한 실패의 순간들이 반복되면 나도 모르게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착한 외국인이 된다.
요즘 나는 네이티브 일본인을 상대로 당당하게 할 말 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소비자로서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여겨질 때 포기하지 않고 컴플레인 하는 게 그 시작이다. 타고나기를 소심한 성격 때문에 한 번 컴플레인 할 때마다 에너지 소모가 장난 아니다. 그래도 해보려고 한다. 한국어로 의사소통 할 때의 나와, 일본어로 의사소통 할 때의 나 사이의 괴리를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게 올해 내 개인적인 미션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까눌레 빵 환불원정기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까눌레 빵이 뭐냐면요.
까눌레 빵은 겉면이 바삭쫄깃하고, 속은 커스터드처럼 촉촉달달한 빵이다. 이 세상에 빵집이 많지만 까눌레를 파는 빵집은 많지 않다. 괜찮은 빵집에 가면 까눌레가 있는지 찾아보고, 있으면 꼭 한 번 사와서 먹어본다.
이 빵은 잘 만들기가 어려운 편인 것 같다. 너무 딱딱하거나, 너무 무르거나, 너무 달거나, 너무 쓰거나 아무튼 딱 이거다 싶은 까눌레는 아직 못 먹어보았다. 그렇게 여러 베리에이션을 경험하며 맛있는 까눌레란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백화점에서 탄 빵을 사오다
어제는 백화점 지하 푸드코트에 갔다가 까눌레를 파는 빵집을 찾아서 당장 사왔다. 색이 진하고, 좀 작은 까눌레였다. 완벽한 디저트 타임이 올 때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렸다가 드디어 오늘 점심에 포장을 뜯었다.
아, 탄 냄새가 났다.
혹시 몰라 먹어보니 이건 뭐 두말할 것 없이 탄 빵이었다. 불 조절을 못했는지 어쨌는지 바닥 부분이 새카맣게 탔다. 육안으로도 탄 부분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빵 만드는 과정에서도 냄새가 났을텐데. 빵집 알바가 감기 걸려서 몰랐을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솔직히 평소 같았으면 따지기도 귀찮아서 그냥 넘어갔을 일이다. 오늘은 왠지 용기(?)가 나는 날이었고, 마침 영수증도 안 버리고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게다가 백화점에서 생긴 일인데 아무렴 매뉴얼에 따라 정중하게 처리해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 길로 먹던 빵을 지퍼백에 넣어 증거물로 확보하고, 영수증을 챙겨서 백화점으로 향했다.
이방인의 컴플레인, 괜한 트집 잡히지 않으려면
해외에서 나는 항상 이방인이다. 많은 경우에 그들과는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행동한다. 그게 허용될 때가 있고 아닐때가 있는데, 적어도 갈등상황에서는 그들의 문화적 맥락에 맞게 행동하는 게 낫다고 느낀다. 갈등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데, 문화적 맥락에 맞지 않는다는 걸로 괜한 트집을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잘한 부분이 있다면, 컴플레인을 하기 앞서 정해진 절차를 확인하고 절차를 지켜서 행동했다는 것이다. 처음 일본에 와서 제일 답답했던 부분이 이거다. 아직까지도 내 생각과 행동을 정해진 매뉴얼 안에 우겨넣는 게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이 적응했다고 느낀다.
이 사례에서는 빵집에 바로 가지 않고 백화점 통합 안내데스크에 불만을 접수했다는 게 셀프칭찬하고 싶은 부분이다.
솔직히 찰나의 순간 빵집과 안내데스크 사이에서 빵집에 바로 가는 쪽으로 상당히 마음이 기울었는데, 이유는 빵집 사장님에 대한 같잖은 배려(?)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내가 백화점에 불만을 접수하면 불쌍한 빵집 사장님이 다음번에 백화점 입점을 못하거나 하는 손해를 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빵집 사장님께 직접 탄 빵에 대해 피드백을 전달하는 게 빵집을 위해 더 좋은 일이 아닐까?
다음에 적을 빵집 사장님의 뻔뻔한 대처를 생각할 때, 백화점 통합 안내데스크에 접수해서 백화점 고객으로서 보호받을 수 있었기 떄문에 그나마 덜 억울하게 상황을 종료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잘한 일이다.
까눌레가 원래 탄 빵이라고요?
안내데스크에 가서 나는 컴플레인을 하러 온 고객에게 기대되는 매뉴얼대로 불만사항을 전달했다. 구매 영수증을 제시하고(어제 저 빵집에서 까눌레 빵을 샀는데요), 불만사항에 대해 설명하고(바닥이 새까맣게 탔더라구요), 증거물을 제출했다(보이시죠?).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빵집 사장님이 오더니 어이없는 설명을 시작하고 나서는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게 되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까눌레는 원래 탄 빵이라고 한다. 고객님들의 미각에 따라서 다르게 느낄 수는 있겠지만, 우리 빵집에서는 늘 이 정도 상태로 까눌레를 내놓는다고. 고객님이 탔다고 느끼신다면 환불해드릴 수 있다고. 아, 진상 취급 당하고 있다.
저도 까눌레를 많이 먹어봤기 때문에
이게 탔는지 안 탔는지 정도는 알 수 있거든요.
이건 까눌레 본연의 맛이 아니라 누가 봐도 탄 맛이에요.
이 말을 지금 글로 쓴 것처럼 우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억울한 마음에 단어나 표현이 잘 생각 안 나서 더듬더듬 했다. 어쨌든 내 의사는 다 전달을 했다. 빵집 사장님은 굽히지 않았다. 자기들 빵에는 문제가 없고, 고객님이 까눌레 본연의 풍미를 탄 맛으로 착각하신 것 같다고. 와우.
내가 이방인이라는 장애물이 없었다면 이 상황에서 빵집 사장님과의 논쟁을 조금 더 길게 이어갈 수 있었을 것 같다. 진상 손님으로 취급받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말이다.
그치만 그게 잘 안 됐다. 일단 탄 맛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사용한 표현(焼きすぎる: 오버쿠킹 하셨어요)과 상대방이 사용한 표현(焦げる: 탔어요)가 달라서 기가 죽었다. 의사전달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음식이 탔다는 일본어 단어가 기억나지 않아서 돌려말할 수 있는 표현을 고른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한편 본연의 맛 이라는 말을 일본어로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도 바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맛(味)이라고 말하고 상대방은 풍미(風味)라고 말했는데, 그 와중에 "풍미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겠군"이라고 생각하며 무의식중에 셀프교정을 하고 있었다.
환불은 받았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빵집 사장님과의 대화가 괴로워질때쯤 백화점 직원이 끼어들어 나름 중재를 해 주었다. 환불을 받고 싶으면 환불 해 주고, 다른 빵으로 교환하고 싶으면 교환을 해 주겠다고 한다. 사실 내가 그 빵값 194엔이 아쉬워서 간 것이겠는가. 더 따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갈 에너지가 없었다. 그냥 환불해달라고 했다.
누가 봐도 탄 빵을 팔아놓고,
까눌레 본연의 풍미 운운하다니.
빵집 사장님의 뻔뻔함에 짜증이 났고, 한편으로는 논쟁(?)이 그렇게 흘러가는 바람에 내가 까눌레 본연의 풍미도 이해 못 하면서 빵이 탔다고 194엔 환불 받으러 온 진상 손님이 된 것 같아서 환불을 받고도 영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증거물(?)인 탄 빵 조각은 경황 없는 와중에 빵집 사장님이 폐기하겠다고 가져가 버렸다. 사진이라도 찍어뒀으면 백화점 고객의 소리에 정식 컴플레인이라도 올려볼텐데. 증거물이 없는 상황에서 글을 올려봤자 "까눌레 본연의 풍미" 운운하는 답변을 받을 게 뻔하다.
오늘 까눌레 환불원정기는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내가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빵집 사장님이 "까눌레 본연의 풍미"라는 소리를 못하도록 까눌레가 원래 어떤 빵이고, 내가 받은 까눌레가 왜 명백히 탄 까눌레인지를 설명할 수 있도록 공신력 있는 소스로 미리 정보를 찾아가지고 갔다면 좋았을 것 같다.
착한 외국인으로 살지 않기, 쉽지 않다.
그래도 계속 노력하려고 한다. 나는 앞으로도 줄곧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는 삶을 택할거니까. 외국어로 의사소통하는 게 불편해서 네네 하고 뒤에서 억울해하는 일상을 반복할 수는 없다. 더 야무지게, 더 치밀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는 외국인이 되겠다. 만만치 않은 외국인이 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