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남들이 다 좋다고 하면 괜시리 더 재보다가 뒷북치는 일이 많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책이 그랬다. 그러다 올해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김초엽의 <인지공간>을 읽고 마음을 바꾸었다.
과장 없이 촘촘하게 짜여진 세계관, 분명히 책을 읽고 있는데 영화를 보는 것 처럼 생생하게 장면을 상상하게 해 주는 전달력, 그리고 SF라는 장르적 상상력을 빌려 바로 지금 이 곳 우리가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던지는 메시지까지.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만난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 책의 첫 번째 수록작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읽고 나서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아져서 급히 글로 옮겨본다.
SF는 공상과학인가?
영화 <백 투더 퓨처>를 좋아한다. 1, 2, 3편 각각도 훌륭하고, 시리즈물로서도 빠지는 것 없이 고루 훌륭하다. 이 시리즈는 1편이 1985년에, 2편이 1989년에, 그리고 3편이 1990년에 나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미래 시점은 2015년. 1985년에는 미래고, 2020년에는 이미 과거가 되었다.
1980년대에 다룬 2015년도. 영화 속 영상은 낡았지만 영화 속 상상력은 낡지 않았다. 30년 전 우리 엄마아빠 세대가 상상한 2015년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 상상이 어느 정도로 현실화 되었는지를 뜯어보는 재미가 있다.
예전에는 SF를 공상과학이라고 불렀다. 속이 빈 상상력. 요즘은 이 말을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다행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는 이미 우리 상상력의 속도에 발 맞춰 갈 수 있는 정도가 됐다. <백 투더 퓨처>가 상상했던 2015년은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구현이 되어 있다. 렌즈로 사진도 찍고 인터넷 서핑도 할 수 있는 웨어러블 디바이스, 신발끈을 자동으로 묶어주는 운동화 등등.
어떤 책을 읽다가 과학자들도 영화 속 화면으로 구현된 기술적 가능성을 보고 연구에 영감을 얻는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난다. 하긴. 오늘날 학문도 워낙 복잡하게 분절화되어 있으니 과학자들 입장에서도 내 연구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비전이 있다면 연구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SF 장르의 의미,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 등장하는 주제들이 그렇게까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닐거기 때문이다. 유전자 편집. 인간 배아의 개조. 인공 자궁에의 수정과 착상. 이런 미래 말이다.
이미 작년 5월 중국의 한 연구자가 유전자 편집 기술을 활용해 에이즈에 면역을 가지고 태어난 맞춤형 아기(Deginer baby)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나서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관련기사 링크) 각국 정부에서 인간에 대한 연구를 규제하고는 있지만, 인터넷 세상에 해커가 있듯 생명공학 세상에도 바이오 해커(Bio Hacker)가 있다. 언제까지 기술적 가능성을 규제로 막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을 개조해도 되는가. 이렇게 우월한 형질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로 구성된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인가. 우리는 그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 답이 없는 질문이다. 답이 없는 질문일수록 답 자체보다는 답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결국 SF는 여러 상황을 상정해, 여러 각도에서, 답이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장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좋은 SF를 감상하고 난 다음 머릿속에 질문이 가득 차는 그 기분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
소설 속 배경은 마을이다. 갈등도 미움도 없이 평화로운 공간이다. 이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되는 해 이동선을 타고 지구로 간다. 한 해 동안의 성인식을 마치고 어떤 순례자들은 마을로 돌아온다. 어떤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 온 순례자들은 마을에서 갈등도 미움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간다.
소설의 화자는 데이지라는 어린이다. 꽃을 잘 가꾸어 화동으로 선발된 재능있는 아이이면서, 어떤 진실은 어른들에게만 허락된다는 마을의 관습에 의문을 던질 줄 아는 똑똑한 아이이기도 하다*. 데이지는 어른들에게만 허락된 세계를 몰래 탐구한 끝에 불편한 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데이지가 자기 친구 안나에게 불편한 진실에 맞닥뜨리기까지의 과정을 풀어놓는 편지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은 갈등의 예술이다. 소설이 시작되려면 갈등의 열쇠가 되는 이런 아이가 꼭 있어줘야 한다.
불편한 진실. 그렇다. 성인이 된다는 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빨간 약을 먹고 고치 같은 캡슐에서 깨어난다. 그가 도달한 현실은 끔찍한 디스토피아다. 그는 그간 가상세계에 안온하게 머무를 수 있게 해 주었던 캡슐에서 벗어 나서야 비로소 성인이 된다.
갈등과 미움으로 가득 찬 지구와,
갈등도 미움도 없이 평화로운 마을.
소설 속 대비되는 두 개의 세계관이다.
<순례자는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어린이들은 마을에서 태어나 지구의 존재를 모르고 자라다가 성인이 되는 해 지구로 순례를 떠난다. 그리고 선택한다. 행복과 불행의 양면이 공존하는 세계인 지구에 남을지, 아니면 불행이 제거되고 오직 행복만 존재하는 세계인 마을로 돌아갈지를 말이다.
생명공학과 자유의지.
소설 속 마을에서는 누구도 나와 다른 사람을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 관용과 이해, 우정, 연대애, 이런 꿈 같은 이야기들이 모두 통하는 곳이 마을이다. 그 이면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유전자 조작을 거쳐 인공자궁에서 태어났다. 다름을 포용할 줄 아는 유전형질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반대로 다름을 포용할 줄 안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균질적인 집단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마을에는 갈등도 미움도 없는 대신, 사랑도 없다.
"우리는 이 마을에서 자란 이들이 서로 연인이 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같은 자궁에서 태어나 자매처럼 자란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낭만적 감정도 성애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단지 우연이기만 할까?"
한 해 동안의 성인식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지 않은 순례자들은 지구의 어디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어쩌면 관용과 이해, 우정, 연대애, 이런 것들이 통하지 않는, 나와는 너무 다른 불가해한 존재를 말이다. 그들은 불가해한 존재를 이해하고자, 그리고 그 또는 그녀와 함께 세계에 맞서고자 지구에 남기로 한 자들이다.
마을에서의 확실한 행복과,
지구에서의 불확실한 행복 중,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불확실한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이 선택을 자유의지 라는 관점에서도 바라보자. 마을 사람들은 창조주의 의도에 의해 성격의 어느 한 부분이 개조당한 채 태어난 존재들이다. 평생 마을에서 서로를 포용하며 살아갈 운명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울타리 밖의 세상에서 사랑을 찾고, 불확실한 행복을 선택한다. 자유의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그 기묘한 방향키를 가지고 말이다.
내 생각에 김초엽 작가는 이 아름다운 우화를 통해 생명공학이 무섭게 발전해 우리가 인간의 신체뿐 아니라 성격의 어느 부분까지 조작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그래도 우리는 인간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자유의지 - 소설 속에서는 사랑 - 라는 키워드로 나름대로의 답을 주려고 하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 이 책의 나머지 수록작도 다 읽을 수 있었다. 다 좋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2018년의 김초엽 작가가 2020년의 내 모습을 미리 보고 썼나 싶을 정도로 감정이입이 됐다. 모종의 이유로 우주선이 더 이상 다니지 않게 된 텅 빈 우주정거장에 앉아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온 행성을 그리는 노인의 모습이, 코로나로 매일 한국을 그리워하는 나와 꼭 닮아 있었다. 하하.
<공생가설>의 상상력도 즐거웠다. 1)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담긴 의미를 탐구하는 연구자가 있다. 2) 가상의 세계를 실감나게 그리거나 표현할 수 있는 예술가가 있다. 3) 우리가 망각한 7세 이전의 기억에 무언가가 있다. 4) 물리적 실체를 넘어서는 집단자아가 존재한다. 네 개의 명제 모두 각각을 읽어보면 그럭저럭 고개가 끄덕여 진다. 그런데 이 네 개의 명제를 합쳐서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나가다니. 작가님 사랑합니다.
<감정의 물성>에서는 말 그대로 물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 사이의 간극. 이 소설에는 우울증 환자가 등장한다. 우울한데 만지면 우울해지는 돌을 사서 집에 둔다. 그게 어딘가에 있고, 그걸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는다고 한다. 그 마음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감정의 물성이라니. 작가의 말을 보니 이 이야기를 좀 더 긴 버전으로 구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꼭 언젠가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고,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글이 점점 길어진다. 김초엽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하며, 여기까지만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