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와 미의식, CEO에게 경험의 가치란, 디자인과 마케팅의 관계
무인양품(Muji)의 아트 디렉터로 유명한 후카사와 나오토(Naoto Fukasawa)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약 40분 남짓 짧은 시간이었지만 라이프스타일, 취향, 경험 등 내 삶 속에 가까이 와 닿는 키워드들을 실감나게 풀어주어서 다 듣고 나오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그가 말하는 엘리트와 미의식, CEO에게 경험의 가치, 디자인과 마케팅의 관계 등등의 주제에 대해 기억나는 범위 안에서 간단히 적어보려고 한다.
내 눈에 보여야 비전이 된다
무인양품은 최근 자율주행 버스를 만드는 핀란드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투자액이 얼마냐면, 0원이다. 돈이 아니라 디자인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필자는 직장 다니면서 운전면허를 땄는데, 매번 휴가내고 꾸역꾸역 운전면허 학원에 가면서 "자율주행 기술이 상용화되면 운전면허 안 따도 될텐데"라는 공상을 했다. 달리 말하면, "자율주행" 이퀄(=) "운전 안 해도 되는 편리한 미래" 라는 등식 말고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술이 우리 생활에 완전히 스며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편리함만 있으면 될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기술적으로 엄청 우수하고 편리하지만 정작 아무도 안 쓰는걸로 놀림감이 되었던 세그웨이(Segway)를 예시로 들 수 있으려나.
자율주행 기술도 마찬가지다. 기술이 기술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으려면 우리 생활의 어떤 부분을 편리하게 해 주고 싶은지, 그로 인해 우리의 생활방식을 구체적으로 바꿔나가고 싶은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줘야 한다.
무인양품의 GACHA 컨셉 영상은 한겨울 눈이 소복이 내린 핀란드와 일본의 시골마을 풍경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대도시에서야 어딜 가든 교통수단이 충분하지만, 인구밀도가 낮은 교외에서 차 타고 어디로 이동하기는 쉬운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 사실에 동의하면, 그때부터는 GACHA가 제시하는 자율주행 버스의 비전이 보다 생생하게 그려진다.
먼저 GACHA는 운전사 없이도 혼자 잘 다니니, 승객이 없더라도 주위를 빙빙 돌고 있다가 누군가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으로 '콜'을 하면 정기적인 루트를 벗어나 '픽업'을 갈 수 있다. 이 경우 승객이 없는 동안에는 '공회전'을 하게 되는데 전기로 구동되어 매연 걱정이 없다. 크기도 애초에 8~9인승 규모로 작게 만들어서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한다.
또 운전사가 없으니 좌석을 일렬로 놓으라는 법도 없다. 둥그렇게 디자인된 차 안에 시골마을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이동식 도서관이나 슈퍼마켓, 병원을 설치해서 부족한 인프라를 대체한다.
기술의 차가움을 이웃의 따뜻함으로. 영상을 다 보고 나니 무인양품이 그리는 자율주행의 미래가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말이나 글로는 도저히 와 닿지 않던 개념인데, 내 눈에 보이니 비로소 비전으로 다가온다.
엘리트의 미의식
후카사와 나오토는 1956년생, 올해로 63세다.
후카사와가 젊었을 때 일본의 기업인들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일본인들이 제일 존경하는 기업인을 꼽으라고 하면 높은 확률로 순위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파나소닉(Panasonic)의 창업자, 경영의 신 마츠시타 고노스케다. 그는 초등학교 중퇴에 무일푼으로 시작해 거대 전자기업을 탄생시킨 신화적인 인물이다. 직원들을 잘 대우해주고 종신고용을 보장해 훌륭한 인재를 육성하는 데 힘썼다고 알려졌다.
과연 마츠시타 회장이 아름다움을 가치를 인식하고 일상생활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하기 위해 노력했는가? 음, 사람들이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았던 주제다. 경영자가 경영을 잘 하면 됐지 무슨 아름다움이란 말인가?
오늘날은 사정이 다르다. 모든 기업이 다 그렇진 않지만,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기업들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아름다움 - 디자인을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경영자도 디자인을 알아야 한다. 디자이너의 제안을 '컨펌'하는 게 바로 경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디자인의 가치를 이해하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려줄 수 있도록 아름다움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을 갖출 필요는 있지 않겠는가.
후카사와는 이 지점에서 엘리트와 미의식 이라는 키워드를 끄집어낸다.
경험의 가치를 말한다
경영자들은 숫자나 그래프를 좋아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쉽사리 수치화되지 않는다. 이 명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말로 설명하려 해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스스로가 직접 경험해보아야 한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간접경험이 아니라 직접경험으로 말이다.
그는 좋은 호텔에 묵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좋은 호텔에 가면 아름다운 분위기와 섬세한 서비스를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점이 좋다고. 그러면서 예시로 든 곳이 아만 리조트(Aman Resort). 음, 과연 쉽사리 수치화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는 곳을 언급해서 조금 주눅이 들었다. 흑흑.
(* 참고로, 아만의 첫 리조트로 유명한 태국 푸켓의 아만푸리 숙박료를 검색해보니 제일 저렴한 옵션도 1박에 1,000불을 훌쩍 넘어간다.)
아만에서 그가 받은 서비스 중 제일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조식 어레인지였다고 한다. 조식을 어디서 드실거냐기에, 식당으로 가거나 룸으로 가져다주는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리조트를 둘러싼 압도적인 자연경관 속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를 지정하면 그 곳으로 가져다주겠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에를 들면 이런 것.
저는 풀숲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이 곳에 평상을 놔 주세요,
저는 아침에 수영하면서 물 속에서 먹고 싶으니 물에 뜨는 트레이를 가져다 주세요.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포인트라 충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받은 충격을 다른 사람에게도 공유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그게 바로 창의성(Creativity)으로 이어지는 거라고 강조했다.
누구를 위해 아름다울 것인가?
디자이너로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자주 관찰하려 한다고 했다. 관찰과 마케팅 리서치는 다르다. 관찰은 질문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위화감이 느껴질 때가 있단다. 왜 위화감이 들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미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최근에 그는 "아무것도 올려놓고 싶지 않아지는 테이블"을 디자인하고 있다. 가정집에 가 보면 식탁에 온갖 잡동사니들이 올라와 있다. 뒤지다보면 몇 달 동안이나 손도 안 대는데 버리지 못하고 그냥 있는 물건도 있다. 그가 만들고 싶은 건 빈 자리가 아름다운 테이블이다. 그 빈 자리에 꽃병이라든지, 정말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 주는 물건 딱 하나만 올려둘 수 있도록 디자인을 하고 있다.
마케팅 리서치는 물론 필요하지만, 이런 아이디어에 리서치가 개입하면 조금 까다로워진다. "아무것도 올려놓고 싶지 않아지는 테이블"은 후카사와가 생각할 때에는 무척 아름다운 물건인데, 세상에는 후카사와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테이블에는 물건을 잔뜩 올려놓을 수 있어야지!
가령, "아무것도 올려놓고 싶지 않아지는 테이블"은 "맥시멀리스트" 타깃층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상품이 아닌가?
이 지점에서 그는 UCM(User Conceptual Model)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UI/UX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란다. 가령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기 위해 정보입력칸을 만들고 가상의 Conceptual Model이라면 맨 아래에서 [완료] 버튼을 찾겠지? 해서 맨 아래 [완료] 버튼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다 다르니까 누구는 오른쪽을, 누구는 위쪽을 먼저 찾을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이트를 이용하는 유저라면 맨 아래를 쳐다볼거야! 라고 가상의 타깃 집단을 설정해 놓고 그에 맞게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는 이 개념을 디자인에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디자인은 없다. 모든 취향을 각가 타깃팅 하다보면 결국 어떤 취향도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 브랜드를 사랑하는 고객이라면, 이라고 가상의 타깃을 정해놓고 디자인을 해 나가고 싶다고.
사대주의를 넘어서
강연이 끝나고 짧게 Q&A 세션이 있었다. 한 아저씨가 런던이나 파리의 거리가 참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하면서,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로, 후카사와 상은 일본의 미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다분히 사대주의적인 발상이다. 와 뭐 이런 질문을. 그가 이 불편한 화제를 어떻게 피해갈지 궁금했는데, 기대 이상의 답변을 해서 내게 감동을 주었다.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오피스 거리 중 하나인 마루노우치에 가 보면 거리 양 옆의 건물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자로 쭉 뻗어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아주 미세하게라도 비뚤어져 있으면 왠지 견디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수정을 가해서 완벽하게 대칭을 맞춘 결과물이다. 그는 이런 점이 바로 일본인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대칭이 잘 맞는다는 게 그 자체로 아름다워 보인다기 보다는, 대칭을 맞추기까지 책임감 있게 시간을 들여 온 것까지를 합해서 외부에서 보기에 일본의 미학이 되는 게 아닌가.
물론 그도 마음속으로는 런던과 파리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을수도 있다. 그치만 사대주의에 사대주의로 답하기보다는, 런던과 파리와 비교하더라도 내세울 만한 일본의 미학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답하는 게 훨씬 멋진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글로벌 무대에서 모국의 아이덴티티를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것과도 연관성이 있다.
좌우대칭이 맞을때까지, 심플하지만 좋은 물건이 만들어질때까지 끊임없이 수정을 가해서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거 뭐야. 글로벌 시장에서 무인양품이 내세운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닮아있잖아!
실은 이 부분은 내가 일본인이었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지도 모르겠는데, 외국인으로서 섞여들어 가 듣고있자니 더욱 인상깊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음, 부러웠다고나 할까. 누군가 내게 같은 맥락의 사대주의적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포스팅은 2019년 9월 13일 아카데미 힐즈에서 열린 무인양품 아트 디렉터 후카사와 나오토의 강연 내용을 갈무리하여 작성했다. 다만 한 달이나 지난 일이라 강연 내용을 그대로 옮기기는 어려웠고, 필자에게 인상깊었던 주제에 필자의 의견을 조금 덧붙여서 재구성 했음을 덧붙인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