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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Apr 29. 2020

공짜표로 접한 연극의 세계

전 세계가 코로나로 신음하고 있는 요 몇 달. 해외에서 생활하는 내 입장에서는 다른 것보다 하늘길이 막혀서 제일 답답하다. 직장 다니느라 휴가 일정을 미리 조율해야 해서 그렇지, 시간만 있으면 인터넷에서 비행기 표 예약해서 반나절이면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언제쯤 갈 수 있을지 묘연하다.


요즘 그리운 한국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 한국에서 자주 가던 식당, 카페, 공원 등등. 그 중에서도 요즘 특히 그리워지는 게 있다면 역시 연극이다. 명동교자에서 칼국수 한 그릇 뚝딱하고 명동예술극장에 가서 연극 보고 나오던 날들이 유독 그립다. 명동 거리는 10시만 넘으면 거진 파장 분위기가 된다. 연극 보고 감동받아 좀 멍해진 채 썰물처럼 사람이 싹 사라진 거리를 터덜터덜 걸어 집에 오곤 했다.


하늘길이 다시 풀려 한국에 갈 수 있게 되더라도 한동안 여러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앉아 연극보는 풍경은 기대하기 어려우려나?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오늘은 그냥 연극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무언가를 좋아하려면 그 무언가에 대해 경험을 해 보아야 한다. 삶의 여러 즐거움에 대해 경험이 쌓일수록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아진다. 그렇게 자기만의 취향을 만들어 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회인이 되어 돈을 벌고나니 보인다. '가성비'를 따지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것에 투자해보려면 역시 돈이 필요하다.


학생 때 나는 부모님께 받은 용돈으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했지만, 새로운 것에 투자할 돈은 없었다. 대신 시간을 투자해서 연극이라는 완전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돈보다 시간이 많은 나날들


2013년에서 2014년에 걸친 2년여의 시간은 내게 길고도 짧았다. 휴학까지 하고 2년 정도 준비하던 시험을 때려치기로 했던 시기다. 다가오는 졸업이 좀 두려워져서 별 계획 없이 휴학계를 냈다. 학교 가기가 그렇게나 귀찮았는데, 막상 학교 갈 일조차 없으니 갑자기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길었다.


말 그대로 돈보다 시간이 많았던 나날들.


이 시절에 나는 참 시간을 물처럼 흘려보낸 것 같다. 약간의 부수입(?)이라면 집에 들어앉아서 미드를 너무 많이 보다보니 영어실력이 늘었다는 것 정도? 심심해서 어쩔 줄 모르던 어느 날, 나처럼 시간 많은 사람은 공짜표를 얻어서 영화며 연극을 보러다닐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개인정보를 받아주세요


그 당시에 내가 제일 잘 이용했던 건 인터파크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인 플레이DB(http://www.playdb.co.kr/)라는 곳이었다. 잘 뒤져보면 간단한 퀴즈를 맞히거나 기대평을 달면 공짜표를 준다는 이벤트가 있다.


처음에는 영화나 뮤지컬 표를 노렸는데, 경쟁자(?)가 많다보니 당첨 확률이 높지 않았다. 내 경우에는 공짜 표 들고 시내까지 나가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영화든 연극이든 상관없었다. 응모자가 제일 적어보이는(=인기가 없어보이는) 공연만 골라 응모하다보니 연극 비율이 높아졌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추첨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성심성의껏 댓글을 다는 편이 당첨확률이 높을 것 같아 시간을 들여 작문도 해 보았다.


'○○○ 배우님의 신작이 나온다니 너무나 기대됩니다~! 얼른 보러 가고 싶네요!'


내 나이, 성별, 핸드폰 번호 정도의 정보야 동네 식당에도 쉽게 주는건데 뭐. 내 개인정보를 받아주세요. 남는 게 시간이었던지라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해서 거의 모든 이벤트에 응모했고, 하다보니 생각보다 당첨확률이 높았다.


(돌이켜보면, 당첨확률이 높은 게 뭐 놀랄만한 일은 아닌것도 같다. 보통 사람들은 '시간이 비는 날' 공연을 보러 가는데, 나는 '공연에서 불러주는 날' 공연을 보러가야 했다. 나처럼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면서, 그 시간을 다른것도 아니고 공연 보는 데 쓰고 싶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연극의 재미를 알아가다


이 시기에 보러다녔던 연극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표 한 장 들고 어디든 갔던 기억이다. 명동예술극장이나 두산아트센터, LG아트센터, 예술의전당 같은 큰 극장은 물론이고, 대학로 골목 한 구석 지하에 빼꼼이 자리잡고 있어 티켓박스 오픈 전에 도착했다가는 극장이 어딘지도 찾기 어려운 소극장까지 장소도 다양했다.


큰 극장에서 하는 연극은 아무래도 무대장치를 신경써서 준비하니까 보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소극장에서 하는 연극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무대에 테이블 하나 갖다놓고 배우들이 천연덕스럽게 그 테이블을 식당이라고도 했다가 학교 책상이라고도 했다가 저승사자의 집무실이라고도 해 가며 연기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현실 속 초라한 무대가 보여서 좀 웃기다가, 차츰 극에 몰입하다보면 진짜로 그 테이블이 저승사자의 집무실로 보이기도 하는 게 참 재밌었다.


몇 개월에 걸쳐 한 달에 거의 열 편 가까이 되는 연극을 봤던 것 같다. 같은 배우를 다른 작품에서 또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하는 편인데, 두 시간 가까이 무대에서 봤던 인연이 두 번이나 반복되니 기억에 남더라. 그러고 며칠 후 지하철을 탔는데 바로 그 배우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앉아 중얼중얼 대사를 외우고 있어서 신기했던 기억도 있다. 그 때 내가 싸인이라도 해 달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반가워하셨으려나? 용기가 없어 혼자만 신기해하고 싸인 받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당시 봤던 연극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여러 개가 있지만, 역시 2013년 명동예술극장에서 해 줬던 <햄릿>을 꼽고싶다. 정보석 배우가 햄릿 역할을 맡았다. 정말정말 운 좋게도 1열 가운데 자리에 앉아 코앞에서 고뇌하는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연극의 경우에 나는 곧 죽어도 1열을 선호한다.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할 수 있다.) 아, 그 때 정보석 배우 진짜 말도 못 하게 멋있었다.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라갔는데, 결말부에서 살짝 이야기를 뒤튼 재해석이 있어 댜욱 인상적이었다. 과거 어느 덴마크 왕실의 이야기를 오늘날 어느 독재자의 이야기로 연결한 것이다. 이거 참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 부분 연출을 보면서 그야말로 너무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던 기억이 난다. 여러모로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다. 연극은 현장성이 강한 장르이니만큼 제아무리 다시 보고 싶단들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더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소극장 공연 중에서는 산울림소극장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좋았다. 공짜표로 간 건 아니고, 대학 교수님이 강력 추천해주셔서 내 돈 주고 다녀왔다. 1969년 초연을 올린 후, 같은 공연을 꾸준히 올려 오늘날까지 왔다는 이야기가 왠지 가슴을 울렸다. 그 사이에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누군가는 말 그대로 고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매 해 부조리의 이야기를 반복해왔다니. 모든 것이 빨리 바뀌는 나라 한국에서 가끔 변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할 때 느껴지는 찌르르함, 그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노배우들의 연기를 보던 때의 여러 감정이 떠오른다.



이제는 내 돈 주고 보러간다!


2015년 초에 드디어 취업에 성공했다. 그때부터는 평일에는 회사에 있고, 주말에는 이런저런 일정이 있고 해서 예전처럼 '불러주시면 언제든 갑니다'라고 공짜표를 받아볼 수 없게 됐다. 그래도 연극이 주는 재미를 한 번 알고 나니 이제는 스스로 찾아다니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특히 명동에술극장은 만 24세 이하 청년에게 '푸른티켓'이라는 이름으로 전 좌석 1만5천원에 티켓을 제공하고 있다. 그 해 생일이 지나기 전까지 거의 매번 정기공연을 챙겨봤다.


이 시기에는 몇몇 극장을 찍어놓고 그 극장의 홈페이지나 페이스북 페이지를 팔로우 하다가 흥미로워 보이는 공연이 나오면 미리 예매해서 보러가곤 했다. 가끔 TV나 영화에 나오는 유명 배우가 연극에도 출연할 때가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갑자기 표 구하기가 힘들어져서 오히려 싫었다. 가령 뮤지컬은 조승우 같은 유명 배우가 나오는 날은 아예 티켓오픈 몇 분 만에 티켓이 다 매진되어 버린다던데, 연극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서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취미였다.



연극은 모국어로 즐기고 싶다.


요즘은 해외 유명 극단과 콜라보레이션 해서 올리는 공연도 꽤 있는 것 같다. 그럴듯한 홍보문구에 반해 보러 간 적이 있는데, 아,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독일어였던가, 어쨌든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제3의 언어라서 소리만으로 알아듣기가 불가능했다. 결국 무대 양 옆에 설치된 스크립터에 비춰지는 자막을 보면서 연극을 관람했는데, 무대 한 번 자막 한 번 시선을 왔다갔다 하느라고 연극 내용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뭐니뭐니해도 연극은 모국어로 즐기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극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다른 장르에 비해 대사의 비중이 커서이다.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가 잘 짜여진 대사를 나름대로의 억양으로 쏟아낼 때 그 감동을 언어의 장애물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일본에 와서는 일본의 연극은 어떨까 궁금해서 한두번 공연에 가 보았는데, 역시 연극은 한국에서 보자는 결론을 얻었다. 일단 내 일본어 실력으로는 대사의 미묘한 뉘앙스와 감정이 전부 다 이해되지 않는다. 설령 운 좋게 이해가 되더라도, 모국어만큼 직접적으로 와 닿을 리 없다.





#Stayhome이 대세이다보니, 장르를 막론하고 유튜브 등 라이브 스트리밍을 이용해 공연을 해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지난주에는 주말 내내 방탄소년단 공연에 푹 빠져 지냈고, 지난 일요일에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조성진 공연을 해 주어서 비싼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아무래도 실제 공연장에서 느끼는 분위기와는 같지 않겠지만, 그래도 화면과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감동은 여전하다.


이렇게 집에 앉아 여러 장르의 언택트 공연을 즐기다보니 문득 연극은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구구절절 연극과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겠지만 내 생각을 이야기하면, 음악이 주가 되는 콘서트와는 달리, 대사와 배우의 연기가 주가 되는 연극은 역시 현장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다. 스크린으로 보는 건 영화나 드라마로 충분하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고, 세계가 코로나로부터 많이 안전해져야 나도 한국에 가고, 극장도 예전처럼 문을 열고 하겠지?


곧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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