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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May 05. 2020

무례한 질문에 상처받지 않는 법

서른 즈음에 깨달은 것, 눈덩이가 아닌 탁구공처럼 가볍게 쳐내기.

나는 누가 나에 대해 묻는 게 싫다.


당신은 나중에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당신이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입니까?


평이하다 못해 식상한 질문들이다. 하지만 막상 질문을 맞닥뜨리면 말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져서 정리가 안 된다. 한정된 시간, 한정된 어휘와 표현으로 더듬거리다가 시간을 다 보내고 만다.


이런 질문을 언제 받게될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역시 입사 면접이다. 아, 면접준비 하던 시절. 내게 참 답답하고 싫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때는 취업만 하면 질문에서 해방될 줄 알았다.


그런데 입사하고 나니 면접 때 받던 경직된 질문과는 또 다른 차원의 질문들에 맞닥뜨리게 됐다.


일본에는 왜 오게 되었는가
미혼인가, (이 질문과 세트로) 결혼 생각은 있는가


한정된 시간 동안 나를 잘 모르는 - 그리고 실은 내게 큰 관심도 없는 - 누군가에게 적당한 호감을 줄 수 있도록 말하고 행동하는 것, 알고보니 그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생활이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질문과 답변 속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전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질문자를 탓하는 것이다. 결혼계획은 사적인 문제인데, 처음 만난 나에게 다짜고자 묻는 건 너무 무례한 처사 아닌가? 뭐, 아닌 건 아닌데요. 문제는 질문을 받았으면 어떤 식으로든 받아쳐야 한다는 것이다.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면서.


아주 가끔은 뭘 그런 걸 물어보세요? 라고 되받아치기도 하지만, (내가 바로 그 90년대생이다!) 살다보면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경우가 더 많다.


한편으로는 그런 질문이라도 할 수 밖에 없는 화자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서로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하는데, 정치나 종교 관련 화제는 피해야 하고, 사회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려 들어도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망설여지고, 서로에 대해 아는 건 없고, 그러다 보니 만만한 호구조사로 흘러가는 게 아니겠는가 싶다.


요약하면 무례함이 반, 대화스킬 부족이 반.


나중에 친구들을 만나 그 때 좀 짜증나더라, 라고 말할수야 있겠지만 그건 나중 문제다.

어쨌든 그 자리, 그 순간을 넘겨야 한다.


질문을 탓하는 건 좋은 전략이 아니다.


그래서 두 번째 전략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답변자, 그러니까 내 생각을 고쳐먹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어렴풋이 깨달은 게 있다. 사람들은 사실 나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 보통은 사춘기를 보내며 깨닫는 거라던데, 내 자아가 비대해 깨달음이 늦어졌나보다.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속 해원으로 등장하는 정은채는 긴 다리로 서촌 거리를 어디든 휘적휘적 누비고 다닌다. 그러다 한 헌책방을 만나 책을 뒤적인다. 책방 주인이 나와 말을 건다. 이 책 얼마에요? 내고싶은 만큼만 내세요. 해원은 그 말에 망설이다가 이렇게 답한다.


그러면, 제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사진은 영화 스틸컷. 해원으로 등장하는 정은채 배우가 정말 아름다웠다.


이 장면은 몇 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아있다. 내 연약한 자아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조심스럽게 감춰놓는 해원의 모습에 나 자신을 투영해보게 되어서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내 자아를 꽁꽁 감춰 둘 필요가 없다는 걸 나는 좀 늦게 깨달았다. 살다보면 나에 대한 질문을 받을 일이 수없이 많지만, 사실 그 질문을 던진 사람에게 내가 어떤 답변을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답변을 하는지보다는, 그냥 그 시간을 보내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거였다.


이렇게 생각을 고쳐먹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게 던져지는 질문이 과거에는 눈덩이처럼 부풀려져 나를 부담스럽게 했다면, 이제는 그냥 가벼운 탁구공을 쳐 내듯 툭 쳐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


일본에는 왜 오게 되었는가
미혼인가, (이 질문과 세트로) 결혼 생각은 있는가


이제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재빨리 대화의 분위기를 살핀다. 상대방이 얼마만큼 들어줄까? 한 문장으로 끝내야 할 때가 있고, 그래도 내 이야기를 덧붙여 한두마디를 더 해 줘야 할 때가 있고, 소수가 모여 편안하게 대화하는 자리라면 시간에 크게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도 있다.


여러 가지 버전의 답변을 준비해두고 나를 얼마만큼 드러낼지, 상대방의 시간과 관심을 얼마만큼 기대할 수 있을지에 따라 적당한 버전을 골라서 말하곤 한다.





두 번째 전략이 안전해보이지만, 실은 큰 문제가 있다. 그 순간을 모면하고자 내 생각을 지우고 적당한 요약본을 마련해 툭툭 쳐내다보니 어느덧 내 생각의 크기 자체가 그에 맞춰져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순간이 모이면 내 삶의 어느 한 부분이 된다. 나는 이제 요약본 이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


한국에서는 주말이면 독서모임에도 가고,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도 떨고 하면서 '긴 버전'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는데, 해외에 나와 혼자 지내면서는 그럴 기회도 많이 줄었다.


그래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한 마디 요약본이 내 생각의 전부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서 말이다.


연극을 보고 싶다,

마스크를 쓰니 굳이 화장 안 해도 되어서 좋다,

도쿄에서 운전하기가 참 어렵다,

엄마랑 여행 또 가고 싶다.


실은 딱 한 마디면 끝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브런치에서는 한 편의 글로 풀어나갈 수 있다. 선데이수라는 브런치 속 화자를 대신 내세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도 마음에 든다. 마지막으로 고맙게도 내 이야기를 참을성을 가지고 읽어주시고, 하트를 눌러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조금 더 힘을 내서 쓸 수 있다. (감사합니다)





제목이 좀 거창했나?

무례한 질문에 상처받지 않는 법이라니.


내게 척척박사 같은 답변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서른 남짓이 되면서 내 나름대로 깨달은 대처방법에 대해 글로 적어보았다. 요약하면,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다 없애버렸으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으니,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건 결국 무례한 질문에 최대한 무게를 실어주지 않는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이 나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눈덩이가 아닌 탁구공처럼 툭 쳐내기. 아까운 내 자아를 고작 탁구공 따위에 담지 말고, 적당히 상대방이 듣고싶어 할 만한 답변을 만들어서 던지는 것도 방법이다.


모든 대화가 다 피상적으로 흘러가는 건 좀 슬픈 일이지만,

살다보니 어떤 대화는 피상적으로 흘러가도록 두는 게 더 나을때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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