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잡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데이수 May 30. 2020

비가 내린다, 비를 피한다.

[여행의 기억을 꺼내먹는다, 태국 빠이 ①] 하루 한 번 스콜이 찾아오고

지금으로부터 6년 전, 2014년 여름의 일이다. 친구랑 둘이서 태국 여행을 다녀왔다. 2주가 좀 안 되는 동안에 방콕, 끄라비, 빠이 이렇게 세 군데를 돌았다. 태국 땅덩이가 남한의 5배나 된다고 한다. 꽤나 큰 나라인데 남쪽끝과 북쪽끝을 모두 동선에 넣었으니 참. 돈은 없어도 시간은 많은 학생때나 짤 수 있었던 일정이 아닌가 싶다.


올 상반기 이래저래 여행계획이 많았는데,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아 다 취소하고 일본에 갇혀있다. 간만에 구글 클라우드를 뒤지다가 태국 빠이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고 새삼 그리운 마음이 들어 6년만의 여행기를 써 보려고 한다. 그간 여행지도 나도 많이 변하고, 여행지에서의 기억도 많이 지워졌다. 정보보다는 인상 위주의 여행기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부분들을 적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빠이는 태국 북부에서 제일 큰 도시인 치앙마이 근처에 있다. 물론 근처라고는 해도, 딱 봐도 멀미 날 것 같은 봉고차를 타고 무려 4시간이나 산길을 달려가야 닿을 수 있다. 도시보다는 마을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슬렁슬렁 걸어서 10분이면 시가지를 다 둘러볼 수 있다. 뭐 딱히 관광할 만한 콘텐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산 위에 금색 불상이 있다거나, 아무리 봐도 흙탕물로 보이는 강에서 래프팅 같은 액티비티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굳이 돈 내고 그런 데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빠이의 시가지. 아침나절이 지나갈 무렴부터 하나 둘 상인들이 나와 과일도 팔고 야채도 팔고 한다. 실은 사진에 보이는 이 정도가 다다.
순도 100%의 흙탕물. 그래도 서양에서 여행 온 젊은 애들은 래프팅 하러 간다고도 하고 했었다. 음, 이해는 잘 안 됐다.


나는 이 심심한 도시에서 거의 일주일 정도를 머물렀다.


빠이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숙소를 정하는 거였다.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도 훨씬 까다로워졌다. 지금은 숙소도 안 정하고 여행지에 도착한다는 게 영 믿기지 않는다. 그때는 괜찮았던 모양이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발길 닿는대로 캐리어 끌고 돌아다니며 숙소를 찾았다. 그 전에 방콕이나 끄라비에 머무를 때에 비해 방값도 비싸지 않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결국 방콕에서는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에 묵으면서 냈던 정도 돈으로 빠이에서는 친구랑 둘이서만 쓸 수 있는 넓은 방을 빌렸다. 우리 방은 2층에 있었는데, 테라스에 길게 누울 수 있는 벤치가 있어서 거기 누워 망고스틴을 까먹으며 비 오는 걸 구경하곤 했었다. (태국 망고스틴은 8월이 제철이라고 했다. 과연 싸고 맛있었다. 시장에서 보이면 한 봉지 가득 사다놓고 손이랑 얼굴이 다 끈적끈적해질 때까지 실컷 까먹는 재미가 있었다.)


6년 전 묵었던 숙소의 전경. 테라스에 누워 밖을 바라보면 눈부신 초록빛으로 둘러 싼 나무들이 모여 기분이 좋았다.


빠이에서의 시간은 거진 다 자전거 위에서 보냈다. 산골마을이라 오르막길이 꽤 많았지만, 산악자전거는 커녕 자전거에 대해 좀 아는 사람이라면 취급도 안 해줄 바구니 달린 고물자전거를 빌려다가 튼튼한 두 다리로 어디든 페달을 밟고 다녔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자전거가 아마 내가 빌린 거였던 것 같다. 동네가 동네이니만큼 잠금장치도 거의 안 하고 다녔다.


시가지는 자전거로 5분도 안 되어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코딱지만한 데다가 버스 시간이 되면 관광객들이 어리버리 길목을 막고있곤 해서 자전거 타고는 거의 가지 않았다. 한편 시가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푸른 논밭이 펼쳐져 있어 시야가 탁 트였다. 운 좋으면 주스가게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위는 염소, 아래는 소.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찍은 사진인데 신기하게 구도가 겹쳐서 재밌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도시에서만 살았고, 남들 다 있는 시골집도 없어서 도무지 이런 풍경을 볼 기회가 없었다. 동물들의 멀뚱한 시선을 받는 순간이 신기했다. 이방인의 기분.


사실 8월의 태국은 비수기 오브 비수기라고 한다. 당시에 숙소 교통 뭐 하나 예약한 것 없는 채 대책없이 다녀도 별 문제 없었던 게 다 관광객이 많지 않은 시기라서다. 학생들 여름방학 기간과 겹쳐서 여행가기 좋은 때인데 왜 비수기인가. 이유가 다 있다. 우기이기 때문이다. 정말 운이 나쁘면 며칠씩 비가 내리는 일도 물론 있다고 했고, 우리가 빠이에서 치앙마이로 이동하던 날 치앙마이에 어마어마한 폭우가 내려 과연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버스 안에서 안절부절 못 했던 기억도 있지만, 운 좋게도 우리가 빠이에 머무른 일주일 남짓 동안은 날씨가 괜찮았다.


어쨌든 명색이 우기이기 때문에 하루에 한두번 꼴로 급격하게 비구름이 몰려오더니 쏴아! 하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일이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예측도 안 되고 대비도 안 된다.


도시에서야 하다못해 지하철역에라도 잠깐 들어가 있으면 될 일이지만, 이 곳 빠이에서는 달랐다. 낌새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고 비를 피할만한 곳을 찾곤 했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만큼 그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비를 피할 곳만 있다면,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구경하며 잠깐 숨을 돌리고 있으면 된다. 머지않아 비가 그치고 거짓말처럼 해가 났다.


이 날은 주변 농가에서 쓰는 창고 같은 걸 발견해 뛰어들어갔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 자전거를 세워두고 비 내리는 걸 구경했다.


빠이에 대해 생각하면 역시 비를 피하던 시간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덥고 습한 한여름에 모자도 없이(!) 자전거 타고 땀 뻘뻘 흘리며 다니다가, 비가 오면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나는 원래 비내리는 날을 싫어한다.)


걱정보다 반가움이 큰 건, 금세 그칠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비 피할 곳을 금세 찾을 수 있으면 좋고, 어쩌다 못 찾게 되더라도 뭐, 비 좀 맞으면 어떠리.


그 때 그 털털했던 여행자는 6년 후 비 오는 날에는 웬만하면 어디 나갈 약속조차 잡지 않는 까탈퀸으로 변모했다. 비 오는 날 눅눅한 공기가 싫고, 신발 젖는 게 싫고, 우산 들고다니는 게 싫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나인데, 그 사이에 좀 더 따지고 재는 것들이 많아져서 그런지.





요즘은 아무래도 대중교통 타기가 좀 꺼려진다. 평일에는 출근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주말에는 되도록 안 타려고 한다. 대신 집에만 있기 답답하면 집 앞에서 공유 자전거를 빌려다가 여기저기 휙휙 페달을 밟고 다닌다. 오랜만에 자전거 타고 다니다보니 자꾸 빠이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도쿄에서 내가 빌리는 자전거는 전기자전거지만,

빠이에서는 기어 하나 안 달린 고물자전거를 잘만 타고 다녔다.


언덕길을 만나면 없는 다리 근육을 다 끌어 써 가며 겨우겨우 페달을 밟거나,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겸허하게 자전거에서 내려 질질 끌고 올라갔던 기억. 그 때는 불편했지만, 돌이켜보면 고물자전거 위에서 내 힘으로 페달을 밟던 시간들이 조금 더 기억에는 잘 남을 것 같다. 그래서 적어본다. 6년 묵은 태국 빠이 여행기.

매거진의 이전글 무례한 질문에 상처받지 않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