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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Jun 05. 2020

내가 더운 나라를 좋아하는 이유

[여행의 기억을 꺼내먹는다, 태국 빠이 ②]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공간


나는 더운 나라를 좋아한다. 땡볕이 정수리로 내리꽂히는 기분, 숨을 들이마시면 덥고 습한 공기가 훅 들어오는 기분, 땀이 나서 온 몸이 습한 기분, 다 좋아하는 편이다. 체력적인 부담이 있으니 평생 살라면 다시 생각해보겠지만, 여행자로서 잠시 스쳐가는 거라면 뭐 괜찮다.


더운 나라를 경험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방콕이나 싱가포르 같은 대도시에 가면 솔직히, 여행기간 내내 더운 바깥 공기를 마실일이 거의 없다. 에어컨이 빵빵한 식당이나 쇼핑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여행의 경험이 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덥고 습한 공기속에 있다가 에어컨 빵빵한 실내로 들어오는 순간 느끼는 해방감. 이런 경험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더운 나라의 매력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싱가포르의 보타닉 가든. 유리돔으로 둘러싸인 실내에서 편안하게 (인공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더운 나라의 더운 맛(?)을 제대로 보려면, 아무래도 더위와 정면으로 한 판 붙어봐야 한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채, 후덥지근한 공기를 들이내쉬며 말이다. 그래서 빠이에서 보낸 시간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 곳에서 지내는 동안은 에어컨의 혜택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에어컨 공기를 마신 게, 기껏해야 숙소에서 정도?


하지만 숙소 밖 세상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빠이를 여행하는 내내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을 만큼 불편함 없이 지냈다. 그 이상한 깨달음의 순간이 기억난다. 문명의 이기 에어컨 없이는 한 순간도 못 버틸 것 같았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며칠이나 에어컨 없이 잘만 지냈던 것이다. 그 순간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적인 바람이 새삼 생소하게 느껴졌었다.


빠이의 한 카페. 사방이 탁 트여있어 특별한 조명 없이도 밝다.





그렇게 더웠는데, 왜 더워서 고생했던 기억은 없을까. 이 글에서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이 탁 트인 공간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년이나 지난 지금 갑자기 빠이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어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현재 일본의 코로나 방역대책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건 '3밀(密)'이다. 밀폐 밀집 밀접 을 피하자는 것이다. (정해진 순서가 있을텐데, 잘 모르겠다.) 뭐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싶지만, 정치인의 기자회견을 비롯해서 일상 속 포스터까지 하도 반복해서 주입하니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신경이 쏠리게 된다.


이제는 긴급사태가 해제되어 웬만한 식당이나 카페가 다 문 열었지만, 환기를 고려해서 고층빌딩이나 지하에 있는 식당에는 웬만하면 가지 않으려 하고, 30분 이상 체류할 일이 있으면 가급적 열린 장소를 선택하려고 한다. 밀폐된 공간에서 타인의 숨결을 의식하며 마스크를 벗었다 말았다 하느니, 잠시라도 그냥 맘 편히 앉아있고 싶어서다.


이런 걸 신경쓰며 지내다보니 빠이에서의 공간이, 그 공간에서 보낸 시간이 떠올랐다.



요즘 자주 들르는 카페. 일본식 좌식문화와 서양식 테이블 문화를 센스있게 결합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든다. 일단 폴딩도어를 싹 접어서 공간을 열어놓으니 마스크 벗고도 마음이 편하다.


빠이에서는 안과 밖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창문을 열 것도 없었다. 벽 자체가 뚫려있기 때문이다.


흔히 아이들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면 우선 네모 모양의 도형을 그리기 시작한다. 빠이의 건물은 네모라기보다는, 디귿자에 가까웠다. 한쪽 벽면을 시원하게 포기했다는 뜻이다. 그 빈 벽면이 때로 정원을, 때로 골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안과 밖의 공기가 서로 통했다. 가만 앉아있다보면 스콜도 찾아오고, 어디선가 바람도 불어오고 했다. 정 못 참겠으면 먼지 낀 선풍기를 내 쪽으로 돌려놓고 잠시 땀을 식히면 그만이었다.


빠이의 공간은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천장이 높고, 한쪽 벽면이 시원하게 뚫려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 빠이에서의 시간이 더 소중해졌다. 안과 밖의 구분 없이 자유롭게 순환하는 공기처럼, 내 마음에도 자유가 찾아오는 기분이었다.


이런 공간에서는 하릴없이 앉아서 바깥을 구경할 수 있다. 멍하니. 힘을 빼고. 한 무리 여행자들이 지나가면 아 저 사람 어제도 봤는데 라고 생각하거나, 태국에는 워낙 개가 많으니 시야에 개가 들어오면 저 개 밤이 되면 무지 무서울텐데 생각하거나, 그런 별 의미없는 생각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친구와 마주앉아 셀카도 찍어보고. 친구도 나도 사진 찍는 걸 쑥쓰러워하는 편이라 사진이 많이 없다. 이렇게 그리울 줄 알았으면 그 때 셀카라도 잔뜩 찍어둘걸 그랬다.


자전거 타고 슝슝 도로를 달리다가 숙소 가까이 올 때쯤 이 카페가 나타났다. 정원에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그네 타지도 않을 거면서 왠지 신이 났다.




그래서 빠이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참 푹 쉬었던 것 같다. 2014년 8월은 내게 상반기 신입공채에 처음 지원해서 실패를 맛본 직후였다. 자기소개서에 있는 말 없는 말 다 갖다붙여서 몇십건을 제출했는데, 그 중 서류합격 통지를 받은 건 한 줌도 안 됐다. 내가 무슨 엄청나게 대단한 꿈을 펼치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 사회에 내 자리 하나 있길 바랐을뿐인데, 그게 참 쉽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가득 안고 에어아시아의 좁은 좌석에 갇혀 태국에 왔다. 태국에서 보낸 시간 중에서도 초반 며칠 - 방콕과 끄라비 - 도시에서 온 사람답게 누구한테 쫓기는 기분에서 벗어나질 못했던 것 같다. 빠이에 갔을 때는 여행이 1주일째를 넘기던, 여행의 중반부를 넘어 후반부로 가던 때였는데, 그때 다행히 이 곳에 와서 다 놓아버릴 수 있었다.


빠이에는 일단, 누울 데가 많이 있다. 아래 사진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베개를 내가 얼마나 갖고싶어 했던가. 정말이지 어딜 가나 이 베개가 있었다. 저 베개에 허리를 기대고 누워 수다도 떨고 책도 읽고 했다.


사서 한국에 가지고 오고 싶었는데, 에어아시아를 타고 오느라고 짐이 될 만한 물건을 거의 사지 못했다. 비행기 타기 전 방콕에서 짜뚜짝 시장에 들렀다가 이 베개를 들었다 놨다 얼마나 망설였는지. 뭐 아깝지만, 어차피 서울에 가지고 와 봤자 서울의 분위기에는 잘 녹아들지 못하고 어색하게 혼자 튀었을 거 같기도 하다.



또 어디를 가든 어렵지 않게 해먹을 찾아볼 수 있었다. 천으로 된 해먹도 있고, 아니면 해먹 하면 흔히들 떠올리듯 그물로 된 해먹도 있었다. 어느쪽이든 누워있다 보면 좀 자세가 불편해져서 아주 오래 머물지는 못하고, 잠깐 땀을 식히거나 눈을 붙이는 용도로 잘 활용했다.


카페에 들어갔는데 해먹이 있다, 그럼 신이 나서 친구랑 돌아가면서 해먹에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워낙 장기여행자가 많은 도시라서인지 도시에 머무는 여행자들도 무언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하루하루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려는 느낌이 있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여유에 영향을 받아 딱 일주일 머물고 떠날 나마저도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거기는 그냥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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