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근처에 예쁜 카페가 새로 생겼다. 벽면이 폴딩도어로 되어 있어 날 좋은 날에는 공간이 통째로 열려있다. 밀폐된 공간에 있지 말라는 요즘 세태에 아주 잘 맞는 인테리어다. 이 지구를 살아가는 누구든 다 비슷한 마음 아닐까. 어딜 가도 공기에 보이지 않는 비말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요즘, 생활반경 안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데 감사하며 자주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카페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다름 아닌 메뉴판이다.
어딘지 허술한 메뉴판이 매번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세트메뉴와 단품메뉴
아침에 영업하는 카페는 으레 모닝세트 메뉴를 갖추고 있다. 여기도 있다. 커피 + 샌드위치 세트가 480엔.
바로 옆 가게인 스타벅스랑 비교하면,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샌드위치 하나 사면 700엔은 족히 나오니까, 이 정도면 수긍할 수 있는 금액이라는 계산이다. 게다가 일본에는 500엔짜리 동전이 있다. ‘원 코인’으로 아침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굉장한 장점이다.
세트메뉴의 장점이 내게는 큰 의미가 없다. 나는 집에서 아침을 챙겨먹고 나오는 걸 좋아한다. 기왕 아침에 부지런 떨고 일찍 일어나서 카페에 와 있다면 그 시간을 샌드위치를 먹는 데 보내기보다는, 음료 한 잔 시켜놓고 이런저런 일들을 하는 데 보내는 편이 좋다. 스마트폰 거치대와 블루투스 키보드를 가져다 놓고 영어 공부도 하고, 이렇게 블로그 포스팅도 한다. 세트메뉴의 이점을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단품메뉴인 커피를 시켜 먹는다.
이 카페의 기본 커피 한 잔은 450엔이다. 세트메뉴 가격인 480엔과 비교하면 좀 애매하다. 억울한 마음이 든다. 30엔만 더 내면 샌드위치 하나 먹을 수 있는데 말이다. 샌드위치를 안 먹고 싶어도 억울한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사이즈업을 위해 얼마를 지불할 수 있는가
한 발 더 나아가서, 아침에 특히 졸린 날 라지 커피를 시켜보았다. 라지 커피 가격은 550엔이다. 레귤러보다 100엔이 더 비싸다.
카페에서 사이즈든 토핑이든 무언가를 추가하는 경우에 내 머릿 속 적정금액은 50엔 정도다. 100엔을 더 냈으니 그에 합당한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는데, 이 카페의 커피는 (무척 맛있긴 하지만) 핸드드립도 아니고 그냥 머신 커피다. 레귤러에서 라지로 사이즈 업 하면서 원두를 몇 알 더 쓰기야 하겠으나, 그게 100엔 어치의 가격을 매길 정도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 같은 고객이 처음이신가요?
사실 위에 적은 두 가지 포인트는 뭐랄까, 이 카페가 내게 주는 다른 즐거움에 비교하면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이 정도는 그냥 눈감아줄 수 있다. 이 글을 쓰기로 결정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다.
하루는 내가 샌드위치 세트를 주문하면서 커피 사이즈를 라지로 부탁했다. 우리 착한 알바 언니의 사고회로에 오류가 생겼다. 이 카페 포스에는 샌드위치 세트에 사이즈업을 추가하는 기능이 없었던 것이다. 언니는 다소 망설이다가, 480엔을 계산했다. 나는 내 사이즈업 요청이 반영 된 건가 아닌건가 좀 의아해하면서 얌전히 앉아서 기다렸는데, 언니가 가져다준 건 다름 아닌 라지 커피였다!
저희 시스템에 세트메뉴 사이즈업 추가 옵션이 없어서요, 사장님께 시정해달라고 건의해볼게요. 일단 오늘은 라지 커피를 준비드렸어요.
언니가 내게 라지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 줬다면 어땠을까? 나도 곤란한 상황을 이해하고, 새로 오픈한 이 카페가 좀 더 합리적인 메뉴판을 만들 수 있도록 기다려줬을 것이다.
나는 아무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 날의 라지 커피에는 이상한 맛(?)이 났다. 마치 우리 집으로 잘못 배달된 우편물을 뜯어 본 것 같은 꺼림칙한 맛이었다. 물론 언니 마음도 이해가 됐다. 매뉴얼에 없는 주문을 받고 곤란했을 것이고, 그런 결론에 이르기까지 가급적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름의 배려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날은 라지 커피를 감사하게 마셨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세트메뉴 주문하면서 절대 사이즈업 요청을 하지 않았다. 단품으로 라지 커피를 마시거나, 아니면 정해진 대로 세트메뉴를 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친절한 서비스 하면 일본을 떠올린다.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당장 일본 편의점에만 가도 알바들이 스마트폰 보거나 딴짓하는 일이 전혀 없다. 매장 규칙상 금지다. 그들은 손님 없을때도 이런저런 잡무를 처리하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가, 손님이 오면 매뉴얼대로 웃으며 매뉴얼대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일본의 친절한 서비스는 매뉴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소비자에게 불편한 경험을 선사한다. 철저한 매뉴얼로 서비스 질을 균질하게 유지하는 건 좋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각각의 종업원이 발휘할 수 있는 재량의 범위가 극히 제한적이다. 한 발 나아가서 종업원들 입장에서도 굳이 유연한 태도를 발휘해 손님에게 대안을 제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오늘 아침에도 이 카페에 왔다. 한동안은 단골이 될 것 같다. 메뉴를 주문할 때 마다 꺼림칙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코로나에 대한 불안 속에서는 이 카페의 열린 공간이 내게 다른 불편함과 바꿀 수 없을 정도의 효용을 주니까, 또 온다.
언젠가는 이 카페를 운영하는 누군가가 내 꺼림칙함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전달하는 종류의 소비자는 아니지만, 신호를 보내주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래서 아침마다 단품메뉴로 라지 커피를 시킨다. 매번 손해보는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시킨다.
이 작은 신호를 언젠가는 수신해주시기를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