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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Mar 15. 2020

전자책을 읽는 이유

내가 이북 리더기를 만난 건 2016년 1월의 일이다. '종이를 넘기는 맛이 없다'거나 '책을 소장할 수 없어 별로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거절하던 끝에, 결국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사버렸다.


그 후로 우리는 어느덧 3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나는 왜 전자책에 마음을 열게 되었나?


(좀 변태같지만) 책 냄새를 좋아한다. 서점에 가면 새 책에서 나는 신선한 종이냄새를, 도서관에 가면 헌 책에서 나는 오래되고 습한 냄새를 마셔본다. 딱히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을거면서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를 때도 있다.


전자책이 아무리 편하다고는 해도 역시 종이책만 가지는 감수성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 이북 리더기를 만난 후에도 우리집에는 종이책이 자꾸 쌓인다.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은 종이책으로 사서 내 손 닿는 곳에 두고 싶다. 가끔 종이냄새 맡으며 책장을 넘길 수 있게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는 어릴때부터 종이책으로 둘러싸여, 종이책에 추억과 애착을 갖고 자라났다. '종이책만 가지는 감수성'은 나 같은 사람에게나 유효한 말이다. 아가때부터 유튜브로 뽀로로 영상을 보며 유튜버를 꿈꾸는 요즘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한 이후에는 어떨지, 이 부분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답을 알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전자책에 마음을 열게 되었는가?


첫 번째. 어떤 책은 종이책보다 전자책으로 읽는 게 더 좋다. 판타지나 대하소설의 경우가 그렇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파운데이션>, <은하영웅전설>. 이런 건 시리즈를 다 모아놓고 보면 10권 남짓의 책이 나오는 긴긴 이야기다. 각자 느끼는 바가 좀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 이런 책들을 읽을 땐 책장 넘기는 속도가 아주 빨라진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기보다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빠른 템포로 함께 흘러가는 종류의 독서다. 편안하게 누워서 크레마로 휙휙 넘겨가며 읽는 게 더 잘 어울린다.


내 보물들. 액정 한 번 안 깨지고, 고장 한 번 안 나고 함께해주고 있다.


두 번째. 책을 구하기 편하다. 크레마 카르타를 만나던 때에 나는 매주 일요일 아침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매주 한 권의 책을 지정해서 읽고 만나는 모임이었는데, 그 주 월요일에 책을 정해서 알려주면 서점에 바로 가기도 어렵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1~2일 후에 받아볼 수 있어서 읽을 시간이 부족했다. 운 나쁘게 주문하는 걸 까먹기라도 하면 그 주 책은 못 읽고 가게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 핑계로 이북 리더기를 구입하게 됐다. 책 제목을 알게되면 즉각 검색해보고 전자책이 나와 있으면 구입한다. 구입한 책을 리더기에 다운받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채 5분도 안 된다.


이 두 번째 장점은 한국에서 해외 도서를, 반대로 해외에서 한국 도서를 구하려고 할 때 더 빛이 난다. 책은 단가에 비해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배송료를 포함하면 배보다 배꼽이 큰 가격이 된다. 가령 도쿄에도 한국 책 서점이 있지만, 한국에서처럼 내가 평소 다니던 동선 곳곳에 서점이 있는 게 아니라 굳이 거기까지 찾아가는 일이 많지 않고, 설령 가게 되더라도 가격책정이 한국 가격의 거의 두 배 가까이이기 때문에 잘 손이 가지 않는다. 전자책 덕분에 읽고싶은 책이 있으면 알라딘에 검색해보고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 책을 읽기가 편하다. 종이책과 비교하면 실물 무게가 가벼우니 여기저기 들고다니기도 좋고, 읽는 자세도 훨씬 편하다. 예전에는 여행 다닐 때 종이책을 한 권씩 넣고 다녔는데, 요즘은 크레마나 킨들에 읽고싶었던 책을 다운받아가지고 간다.


종이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 하루종일 어깨가 아픈데, 이북 리더기가 있으면 걱정이 없다. 배터리도 거의 신경쓰지 않아도 될 만큼 오래 가기 때문에 여행 내내 잘 읽을 수 있다. 물론 핸드폰이나 아이패드로도 읽을 수는 있지만, 전용 리더기를 사용하는 편이 눈도 덜 아프고 좋다.


이런저런 장점들을 경험하며 한 번 마음을 열고 나니, 어느덧 전자책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종이책? 전자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은 여전히 종이책으로 읽는 편이 낫다.


일단 그림이나 도표가 많은 책이 그렇다. 미술에 대한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런 책일수록 꼭 종이책으로 읽는다. 종이책에서 출판사와 작가가 여러 고민끝에 이 페이지에는 이 크기로 그림을 두고, 나머지 공간에 텍스트를 배치하자 라는 식으로 편집을 다 해 두었을텐데, 전자책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 모든 조화가 깨져버린다. 이런 경우에 Ebook 대신 PDF 버전을 다운받아 읽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디바이스에 최적화된 형식이 아니다 보니 보기에 불편하다. (스마트폰으로 PC버전 사이트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학술서의 경우는 '케바케'지만, 종이책으로 보는 경우의 장점이 뚜렷하다. 읽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휘리릭 책장을 넘겨 앞 뒤 내용을 확인해가며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책에도 책갈피/하이라이트 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스마트폰에 비해 반응속도가 빠르지 않다. 만약 책갈피/하이라이트로 표시해놓지 않았다면 그 부분을 다시 찾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북 리더기도 초창기에 비해 디바이스 성능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하나하나 페이지를 넘길 때 불편함이 없다뿐이지 그 이상의 복잡한 조작을 하려고 들면 무지 답답해진다.


독서모임 할 때 이 단점을 극명하게 느꼈다. 누구는 종이책으로, 누구는 전자책으로 읽어 온 다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결국은 종이책 가져 온 사람의 책을 넘겨가며 이 부분은 이랬다고 이야기를 주고받게 된다. 디바이스 성능이 아무리 좋다한들, '아 그 어디 있었는데'라는 막연한 예감만으로 책 속의 그 구절을 찾으려 들 때는 디지털보다 아날로그 - 손 - 이 빠른 것이다.



킨들? 크레마?


나는 3년 전에 크레마 카르타를 먼저 사서 잘 쓰다가, 1년 전 쯤 킨들 페이퍼화이트를 추가로 구매했다. 크레마는 한국어 책 읽을 때 쓰고 킨들은 영어 책 읽을 때 쓴다. 사실 각 디바이스를 조금 더 똑똑하게 쓰려고 든다면 크레마로도 영어 책을, 킨들로도 한국어 책을 읽을 수 있겠지만 귀찮은 게 싫어서 그냥 둘 다 쓰고 있다.


크레마도 좋은 기기지만, 기기 자체만 놓고 보면 킨들이 조금 더 마음에 든다. 그 이유로는 몇 가지가 있는데, 일단 반응속도가 빠르다는 것, 그리고 독서가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소소하지만 편리한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소소하지만 편리한 기능 첫 번째. 나침반 기능이다. 아래 화면에서 왼쪽 하단을 보면 [ 35% / 13 mins left in chapter ] 라는 메시지를 볼 수 있다. 책 전체 중 어느 부분을 읽고 있는지는 물론, 현재 챕터가 어느정도 남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독서에도 흐름이 있어서 책을 읽다가 챕터 중간에 끊으면 다음에 다시 읽을 때 흐름을 따라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 기차나 지하철에서 독서할 때 나름대로 시간관리를 할 수 있게 해 준다.


두 번째. Wordwise 기능도 좋아한다. 독서중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를 꾹 눌러서 의미를 확인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 책 읽는 흐름이 끊겨버려 좀 별로다. 그럴 때 킨들에서 Wordwise 기능을 켜면 '내가 모를법한' 단어에 자동으로 뜻 풀이를 붙여준다. 난이도도 커스터마이징이 된다. 내 독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설정할 수 있다.


나침반 기능과 Wordwise 기능을 각각 화면에 적용하면 이런 식이다.


마지막으로 하이라이트 기능이다. Amazon의 어마어마한 유저수를 십분 활용해서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부분에 하이라이트 했는지 보여준다. 사람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 있다. 대부분 경우에 다른 사람들이 하이라이트 한 부분은 내게도 어떤 식으로든 인사이트를 준다. 자칫 그냥 지나갈뻔 했던 부분이라도 조금 더 눈여겨 보게 되는 효과가 있다.


About this book 이라는 메뉴를 열면 이 책을 읽는 데 통상 몇 시간이 걸리는지, 어느 부분에 많이 하이라이트가 되었는지 등등의 고급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어릴 때 방학이 되면 하루종일 할 일도 없고 해서 내 방 침대에 엎드려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땐 시리즈의 4번째 이야기인 <해리포터와 불의 잔>까지 나와있었다. 그 정도는 한 3일 정도면 다 읽을 수 있었다. 귤 까먹으면서 부주의하게 읽다보니 책장이 다 누래진 오래된 종이책.


그 기억이 꽤나 깊게 남아있어서 <해리포터>를 떠올리면 그 때 그 기억만 떠오를 줄 알았다. 놀랍게도, 시간이 지나니 기억도 새롭게 덧씌워졌다.


지난 해 킨들을 새로 사자마자 <해리포터> 시리즈 전 권을 다시 읽었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왜 볼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지.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새벽 2~3시까지 읽다가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등이 결린다 싶더니 킨들을 깔고 자고 있었다. 졸린눈을 비비고 회사에 가서도 점심시간에 카페에서 한 손으로는 샌드위치를 쥐고, 한 손으로는 킨들 페이지를 넘겨가며 마저 읽었다.


그렇게 <해리포터>에 얽힌 기억이 하나 더 생겼고, 종이책과 전자책은 내 추억의 한 페이지씩을 사이좋게 나눠 가지게 되었다.





전자책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전자책이 과연 종이책을 대체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내 경험에 비추어서 이야기하면, 나는 종이책과 전자책이 서로 공존했으면 좋겠다. 만약 사람들이 전자책을 많이 읽게 되면서 종이책이 덜 팔리게 된다면, 종이책 만드는 사람들이 힘 내서 종이책을 만들도록 종이책에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할 용의도 있다.


그만큼 종이책과 전자책은 서로를 대체하기에는 각자 좀 다른 방식으로 가치가 있다. 앞으로도 종이책은 종이책대로 전자책은 전자책대로 각자의 방식이 주는 장점을 음미하며 독서 생활을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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