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8 서울 대현동

언제나 꿋꿋이 자리를 지켜 온 사람들 덕분에

by 길낯선

2025년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 서울을 방문했다. 지금은 경남 양산에서 살고 있으니, 서울을 한 번 가려면 대단한 결심을 해야 한다. 게다가 이날은 당일치기로 KTX 표를 끊었다. 나는 지금 일주일에 하루만 쉬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서울에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일주일쯤 전에 1~2년 정도 몸담았었던 청년 기후 운동 단체의 후원 행사 홍보 글을 보고 무심코 좋아요를 눌렀다가, 한 번 와달라는 DM을 받았기 때문이다. 멀어서 가기 귀찮아 다른 핑계를 대고 거절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을 오랜만에 뵙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골목길인데도 건물들이 하나같이 높아서 역시 서울은 서울이구나 느끼게 해 주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어딘가 모르게 정의감에 불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정신병원에서의 경험이 20세 이후의 나의 인생의 많은 부분을 좌우했다. 덕분에 새로 입학한 대학교에서는 반드시 사회복지를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고(그러나 그 전공은 3학점 수업 하나만 듣고 내려놓았다), 학회에서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을 하고 싶었다. 또한 정신질환 당사자로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비인간동물과 교감하고 싶었으며, 내가 발 디딛고 살아가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내면의 부조리함과 계속해서 맞닥뜨렸다. 나는 나의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주었으며, 정신질환은 새로운 병명으로 진화하여 내 앞에 다시 나타났고, 내 인생을 결정지을 것만 같았던 20살의 강렬한 감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머릿속에서 점차 잊혔다. 그래서 나는 마치 나를 정의하는 새로운 이름을 다시 찾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완전하고 무질서하며 어딘가 어지러운 면면을 담는 걸 좋아한다.


그런 고민을 이어가는 와중에 기후 운동 단체에 들어갔다. 대학교 졸업이 가까워지던 시기에도 나는 여전히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놓지 않았으나, 사실 100%의 확신은 없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없는 게 당연했을 듯싶다). 기후 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도 나름의 이런 비슷한 딜레마가 있었다. 내가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데, 내가 감히 뭐라고 기후 운동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낼까 싶었다. 물론 기후 의제는 한 두 사람만의 힘으로는 절대 여력이 안되고 정부와 기업, 사회를 움직여야 하는 엄청난 일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예전처럼 마음이 뛰지 않았고, 마치 내 상태가 미지근한 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경에서 믿음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했던 것처럼, 나는 빛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여전히 서투르고 부족함 많은 20대 중반의 청년이라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자각해야만 했다.



이날 내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날씨가 흐리고 날이 어두워지던 참이었다.


그렇기에 이날 내가 오랜만에 뵈었던 기후 운동 단체 사람들이 내게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현재 후원회원으로서만 함께 할 뿐이고, 다시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자신도 없다. 그럼에도 지금도 자신의 자리에서 기후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걸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이들도 각자 마음속에서는 운동을 하면서 느끼는 좌절감과 어려움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날처럼 각자 연대하며 힘을 내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서울에 제대로 있었던 시간은 불과 3시간 남짓이었지만, 서울역에서 물금역으로 내려가는 길에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서울 언제 또 가나?


나의 보잘것없음과 삶의 부질없음을 자주 느끼는 요즘이다. 자기 전에 나는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자주 떠올린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것 같다. 우울증으로 한창 힘들어할 때 추천받아 사놓았던 '시지프 신화'는 한 페이지도 펼치지 않았지만, 내가 삶을 통해 그 책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내 마음속의 부조리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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