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궁금하지 못했던 것들

01. 필요한 만큼 살고, 모든 것을 내어주고 간다

by 햇귀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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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 지금도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내 인생 야생화와의 첫 만남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카메라 하나 들고, 동호회 사람들을 따라 산을 타기 시작했을 때는 미처 몰랐다. 그날의 경험이 어떤 미래를 내게 가져다줄지를...



시작은 과제였다.

한 학기 프로젝트였고, 학점을 이수하기 위해 식물을 채집해야 했다. 채집 활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식물 사진으로 프로젝트를 대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작정 작은 도감을 하나 사고, 당시 유행했던 카페의 야생화 사진 동호회에 가입했다.


도감에 인쇄된 작은 꽃들에게는 각기 이름이 있었다. 이름을 알게 되니 발밑에 그들이 보였다. 참 묘한 일이었다. 기묘한 설렘을 안고 동호회 첫 모임에 참석했다. 천마산 출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4월의 천마산은 야생화 천국이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수많은 야생화들이 사람들을 반겼다. 이름도 생소한 얼레지와 현호색부터 이름도 참 예쁘다 생각했던 노루귀와 바람꽃까지, 셔터가 바쁘게 움직였다. 셔터가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우리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동호회의 규칙은 간단했지만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규칙 01. 산에 남기는 발자국을 최소화할 것

앞사람이 낸 발자국은 우리의 길이 되었다. 사람의 발밑에 스러지는 생명을 최대한 줄여보자는 뜻이었다. 내 발밑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는지를 한걸음 한걸음마다 체감하며 움직일 수 있었다.


규칙 02. 좋은 구도와 배경을 위해 야생화 주변을 훼손시키지 말 것

야생화 주변 낙엽 부스러기도 조심스럽게 치웠다. 낙엽 부스러기조차 사진을 찍은 후에는 다시 있었던 곳으로 되돌렸다.


두 번째 규칙은 나에게 좀 놀라운 규칙이었는데,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 주변을 훼손시키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 술 더 떠서 나만 좋은 사진을 건지겠다는 몹쓸 심보를 가진 사람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 참 씁쓸했다.


하지만 씁쓸함도 잠시, 좋은 사람들과 좋은 풍광들과 새로운 야생화들은 좋지 않은 기분을 금세 끌어올려주었다. 그렇게 이름 모를 야생화들과 반가운 만남이 지속되었다. 어느덧 반짝거렸던 하얀 햇살이 부드러운 노란빛을 머금었다. 오후 4시. 사진을 남기는 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빛이 찾아오는 시간이었다. 신이 난 사람들과 덩달아 나도 신이 나 셔터를 눌러댔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노란빛에 푸르스름함이 걸쳐지고 실컷 셔터를 눌러 댄 사람들은 하나둘 바위에 걸터앉았다.


"얼레지밭 예쁘지요?"


한참 촬영본을 확인하는데 옆에 앉은 동호회장님이 물어오셨다.

우리가 걸터앉은 바위 근처에는 잎이 얼레덜레하다해서 얼레지라 불린다는 야생화가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그 면적이 꽤 되어서 얼레지밭이라 할 만했다.


"네, 무척 예뻐요. 야생화 중에도 이렇게 화려한 꽃이 있는지도 몰랐네요. 다음 달 출사에 꼭 다시 와야겠어요."


"호호, 다음 달 출사에서는 얼레지는 흔적도 찾지 못할 거예요."


"네?! 왜요?"


얼레지는 오늘 본 야생화 중에서도 큰 편에 속했다. 꽃송이의 크기도 그랬고, 잎은 훨씬 더 컸다. 수줍게 숙인 고개 아래 불꽃과 같은 자줏빛 무늬를 품은 아름다운 꽃이건만, 꽃이 진다고 흔적도 찾지 못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왜 긴요. 얼레지의 시간이 다 갔기 때문이죠. 자기의 시간이 지나가면 다음 꽃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거예요. 그게 꽃들의 배려이자, 숲의 규칙이죠."


동호회장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셨다.


"사람은 제 흔적을 남기려 그렇게 애를 쓰는데, 이 아이들은 그렇지 않아요. 필요한 만큼 땅을 다 쓴 후에는 땅이 필요한 다른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가는 거예요. 이 큰 잎들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생각해 봐요. 개화가 늦은 작은 꽃들이 올라오기 힘들겠죠? 이 아이들이 한정된 땅에서 함께 사는 방법이죠."


나는 새삼 얼레지를 내려다보았다. 이 커다란 꽃이 흔적도 없이 사그라진다고? 다른 꽃을 위해?

다른 꽃을 위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건 어쩌면 인간의 눈으로 덧씌운 현자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는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제 욕심을 부리지 않기에 하나의 땅에서 피고 지고 하는 저 무수한 생명들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 날, 나는 천마산에서 내가 그동안 미처 궁금해하지 못한 것들과 마주했다.

저마다 이름을 가진 수많은 야생화, 깨진 바위틈에서 간신히 발을 붙인 야생화, 누가 보지 않아도 묵묵히 저마다의 생을 열심히 살아내는 야생화, 가르쳐주지 않아도 제 계절에 피어나는 야생화, 공존을 위해 제 영역을 기꺼이 나누는 야생화...


알지 못해 궁금해할 수도 없었던 것들.

야생화는 내가 전혀 궁금해하지 못했던 생명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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