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트렁크>는 기대한 사랑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별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서현진과 공유의 다소 밝은(?) 클리셰한 계약결혼 이야기 인 줄로만 알았던 <트렁크>
하지만, 시종일관 사랑의 '시작' 보다는 사랑의 '마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드라마는 이야기한다.
주인공인 노인지(서현진), 한정원(공유), 이서연(정윤하) 이 세 사람의 관계는 기묘하다.
이혼한 부부 관계인 정원과 서연이지만, 정원은 서연과 다시 재결합을 원하고 있고,
그런 정원에게 서연은 인지와 1년 간의 NM 회사를 통한 계약결혼을 하라고 제안한다.
그래야 본인에게 돌아올 수 있다며, 시종일관 이상한 소리와 제안을 늘어놓는 전부인.
정원이 인지와 한 집에서 가짜부부로 얽히면서 혼란스러워 하자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이더니,
어느 순간 인지와 정원이 서로에게 빠져들자 자신이 뜻했던 바가 아니었는지
계약결혼을 종료하라며 폭주한다.
(서연이는 뒤틀린 정서를 갖고 있어서 다른 여자에게 맞닿아 있는 정원을 보아야 다시 그를 갖고 싶어지는 심리가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왜 이리 뒤틀려 있는 것일까?
왜 전 부인은 다른 여자와의 계약결혼을 요구하면서 까지 정원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 정원과 서연의 관계는 껍데기 이혼이었을 뿐 온전한 안전 이별을 하지 못한 것이다.
서연의 유산을 기점으로 파탄난 그들의 관계는 이혼도장만 찍었을 뿐 그 누구도 그 상처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이제 왜 함께 할 수 없는지에 대해 복기하고 정리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유산이라는 상처 앞에 정원과 서연은 솔직하게 관계의 종료를 고할 용기가 없었기에,
뒤틀린 계약결혼을 선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인지는 왜 끊임없이 껍데기뿐인 계약결혼을 업무로 하는 NM 회사의 차장으로 일하고 있는 것일까? 인지 역시 정원과 서연처럼 결혼에 대한 상처가 있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 파혼을 하게 되었지만,
그가 돌연 5년 간 잠적하는 바람에 인지 역시 그와 온전한 이별을 해내지 못한 채 그렇게 산송장처럼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인지가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NM 회사 차장으로 일하며 가짜결혼을 거듭하는 행위 덕분이었다.
그렇게 결국 파혼한 도하가 5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제야 인지도 도하와 진정한 안전이별을 할 수 있게 된다.
드라마의 스토리와 외피만 보면, 사실 정상적인 인물들이 없다.
이상한 형태의 계약결혼을 제안하는 자(서연), 수행하는 자(인지), 수락하는 자(정원)들의 삼각관계 속에서 이들의 정서가 겉보기엔 마냥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한 커플 더 생각해 보면, 이들은 그저 누군가와의 관계 종결이 필요한,
그래서 새 출발이 누구보다 하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별에는 많은 형태가 있다.
일방적인 잠수 이별, 아무리 붙잡아도 돌아오지 않는 상대와의 처절한 이별 등등...
그래서 요즘도 심심찮게 안전 이별을 하지 못한 커플의 비극적인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참담한 뉴스를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있다.
사랑은, 결혼은 일방적인 방향을 향할 수 없다.
양방향을 향해도 현실적인 삶에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결혼은 현실이라고 결혼선배들이 조언하는 이유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나 안전하게 이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성숙을 갖춰야 사랑의 마침표를 찍어본 사람이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끝났다는 것을 고하기 싫어서 회피하는 사람은,
상대가 이미 끝났다고 고했음에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히 일방향적인 소통의 굴레에 갇힌 채 그다음 단계의 성숙한 사랑을 일궈내기 어렵다.
우리의 뒤틀렸던 정원 / 인지 / 서연은 말미에 결국 각자의 방식대로 안전한 이별을 해내고 만다.
그리고 비로소 내면 깊이 원했던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드라마 <트렁크>를 보며 묘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그만큼 관계의 종결은 사랑의 마침표는 시작의 창대함 만큼이나 뼈아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