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언어, 학습된 자책감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인기 없어. 적당히 멍청한 척도 하고 살아야 적이 없지."
"너무 잘난 여자는 남자들도 부담스러워해. 특히 한국남자들은 너같은 여자랑 살면 피곤해서 싫어한다. 차라리 외국인을 만나면 몰라도."
누군가에게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이런 말들을 들었다면, 정신 건강을 위해 이런 화자와 더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에겐 그런 선택권이 없다. 이런 언어들은 지인도 친구도 아닌, 주로 나의 부모님의 입을 통해서 내게 전해지곤 했으니까. 너그럽게 받아들이면, 한국에서 여성으로 특히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으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미리 헤아려 자식이 앞으로 받게될 웬만한 상처에 대한 면역을 키워주려던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다. 기억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대략 10대 때부터 20여년간 정기적으로 이런 언어들에 노출되었음에도 여전히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잘못된 전략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말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이런 논리의 바탕이 되는 전제 자체에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너무 똑똑한 (혹은 잘난) 여자는 사람들 (혹은 남자들)이 싫어한다. 그러므로 적당히 멍청한 척을 해라' 이 말에는 내가 '너무 똑똑한' 여자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너무나도 간명한 3단 논법. 너무 똑똑한 여자는 사람들이 싫어한다. [너는 너무 똑똑한 여자다.] 그러므로 적이 없으려면 적당히 멍청한 척을 해라.
허나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내가 '너무' 똑똑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다. 이루어 놓은 성과만 보면, 그래도 한국의 입시와 각종 제도의 적자라고 보아야 마땅하겠지만, 사실 나는 죽도록 노력해서 겨우 지푸라기 하나를 잡아내는 능력 정도를 가진 '노력형' 인간이다.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을 나왔지만 그마저도 재수를 해서 들어간 학교였다. 언론사에서 기자생활을 했지만, 사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곳도 아니었고, 그곳 역시 몇번의 낙방 끝에 기자의 꿈을 포기하려던 찰나, 가까스로 입사했다. 지금은 다소 늦은 나이에 박사 과정에 있으니 차라리 지금의 나를 두고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면, '음, 객관적인 학력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 있겠군.'이라고 웃으며 넘길 수 있으려나. 어찌됐든 나는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여긴 적은 없지만, 오히려 자신에 대해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 가깝다.
게다가 부모님과 선생님의 강권으로 우수한 학생들이 밀집된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래로, 나는 '진짜 잘난' 이들의 비범함과 내가 가진 극도의 평범성이 야기하는 차이와 간극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됐다. 통학버스에서까지 메모장에 빼곡히 적은 영어단어를 외우던 내게 '우와, 너 진짜 열심히 한다. 너처럼 공부하면 전교 1등하겠다'라고 말한 뒤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친구는 나보다 한참 앞선 성적을 받고, 끝내는 나보다 훨씬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 두번째 본 수능시험 성적표를 받으러 졸업한 학교에 찾아갔을 때 성적표를 배부하던 선생님은 혀를 끌끌 찼다. '재수한 애들은 성적이 다들 많이 올랐던데 넌 왜이러냐. 이래서 원서 쓸 대학이나 있겠냐? 삼수할 거지?' 비교와 무시는 일상이 됐고 10대의 야들야들한 감수성은 매일 무차별 공격을 당하곤 했다. 겸손함을 키우기에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집에서만큼은 나는 '너무 똑똑한' '여자'였다. 물론, 우리 삼남매 가운데 내가 학업성적이 가장 우수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주로 이런 말들을 내뱉는 순간은, 나의 지적능력을 인정하는 순간이 아닌, 그들의 논리로 나를 설득할 수 없거나 나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을 때였다.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자식에 대해 홧김에 던지는 말쯤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겠다.
집안팎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괴리감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부모님들의 언어에 담긴 '너무 똑똑한 '여자''라는 프레임이다. 부모님의 언어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진짜 이유다. 그 말들은 과거 남자친구와 연애가 틀어질 때마다, 일터에서 사소한 분쟁을 겪을 때마다, 남편과 다툼을 할 때마다, 시부모님과 작은 갈등이 생길 때마다 불쑥 찾아와 불필요한 자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몸서리치며 부정했던 언어들을 반복학습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 내면화한 모양이다. 사소한 갈등이 생길 때마다 사고의 회로는 제멋대로 자기반성의 경로를 오고갔다. 내가 잘나(난척을 해)서 남자친구를, 남편을, 동료들을, 시댁을 불편하게 한 건 아닐까. 그냥 가만히 있었어야 했나. 멍청한 척을 해야 했나.
기성세대의 올바르지 못한 언어습관이라고 대충 넘기기엔 그 언어가 주는 무게가 만만찮다. 유학을 하면서 좋은 성과가 있어도 나는 좀처럼 양가에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좋은 소식을 전하면 자랑스러워하는 엄마의 말 끝에는 항상 '공부를 잘하면 뭐하나. 아이를 낳아야지. 시댁에서 얼마나 속상하시겠어. 너무 똑똑한 며느리, 시부모님들은 불편할 수 있어.'라며 모든 성과를 한 순간에 허무하게 무너뜨리는 묘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과의 통화는 3분이내로 간단하게 끝내시는 시부모님 역시 나와의 통화는 한탄과 서운함으로 길게 늘어지곤 하지만, 결코 나는 그 긴 대화 속에 좋은 소식을 담아 건네지 않는다. 미국 유학을 앞두고, 시댁에 나의 합격 소식을 전했을 때, 그 삼엄한 분위기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니들이 교수가 아니라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우리가 좋아할 것 같으냐. 자식이 옆에 있는게 중요하지.' 자식을 곁에 두고 자주 볼 수 없는 서운함을 드러내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부가 함께 결정한 유학이었지만, 나 때문에 남편이 기약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는데 대한 심적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당분간 마음껏 쉴 수 있음에 즐거워했지만, 나는 거듭 '너무 똑똑한 여자' 컴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환영받지 못한 유학의 불씨를 댕긴 장본인이었기에 시댁과의 통화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죄인 모드'다.
엄마의 말처럼, 한국 남자가 아닌 외국인과 살았다면 달랐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엄마는 왜 하나의 속성으로 묶을 수도 없는 비한국인을 '외국인'으로 통칭하면서까지 깨알같은 대안을 제시했을까. 만약 내가 부모님의 눈에 '너무 똑똑한 '남자''였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