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는 것에 대해 내가 크게 오해한 것들 중 하나는, 나이를 먹으면 역치가 높아질만큼 높아져 웬만한 일에는 끄떡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역치는 결코 나이와 비례하여 증가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자극에도 감각기관이 알아서 반응하는 유독 낮은 문턱값을 가진 나는 쉽사리 상처받는 어린이었고, 청소년이었으며, 사회초년생이었다. 내가 "유독" 쉽게 상처 받는다는 자각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내가 유독 외부의 환경, 타인의 언어, 주변의 시선에 예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또래 집단과의 비교에서 시작됐다. 함께 떠들다가 선생님의 꾸지람을 듣고도 바로 뛰어나가 놀고 있는 짝꿍을 창밖으로 바라보던 어린 나는, 눈물범벅인 내 얼굴과 웃고 있는 친구의 얼굴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때만 해도 내가 유독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라고 자각하진 못했다. 대신, 대책없이 해맑은 그 친구가 이상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의 정서적 유약을 깨닫게되는 일은, 갑작스레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만큼이나 강렬하고 또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거나 시험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10대의 나는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곤 했다. 남자친구에게 실연을 당한 뒤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너는 유독 상처를 잘 받는 것 같애' '힘들긴 하겠지만 뭘 그렇게까지 힘들어해' 주변에서 한 마디씩 보태는 말에 또 한 번 상처받는 자신을 보면서, 나의 '유리멘탈'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나면 조금은 낫겠지, 스무살의 나는 그 기대를 보란듯이 저버리고 치열하게 상처받았다. 20대의 치명적 매력인 '쿨함'과는 거리가 먼, 질척거리는 날들이 계속됐다.
나이를 먹어서 좋은 일은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다는 거야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노파가 되어버린 소피가 하던 말을 머릿 속에 곱씹으며, 그 때의 나는 차라리 빨리 늙기를 바랬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서른까지 가는 길은 상처투성이었고, 30대가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남들이 보기에) 사소한 일에도 이리저리 놀라고 휘둘리는 심약한 아줌마였다. 도리어 나이가 들수록 상처가 아무는 속도만 더뎌졌다. 역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회복력만 낮아진 셈이다.
오늘, 나보다 먼저 박사과정을 시작한 한국학생과 점심을 먹었다. 알고보니 대학교 5년 후배였던 그 친구와의 점심을 먹고 돌아온 뒤 나는 어쩐지 유쾌하지 않았다. '언니'나 '선배'는 고사하고 "XX씨"라고 부르는 그 친구의 호칭 때문이었는지, 점심을 사겠다는 말에 '잘먹었다' '감사하다'는 말 대신 '그럼 제가 커피사죠'라고 하던 그 친구의 사업 파트너 같은 언어 습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소개팅 자리에 나간 20대의 나처럼, 조금의 불편한 침묵만 있어도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끝없이 떠들어대던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져서였는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몇 주 후면 꽉찬 서른 아홉이 되는 나는 여전히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고, 쉽게 상처받고, 또 그 상처를 되새김질 하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혹이 되면 조금은 나아지려나. 기대는 없다. 아마 70대가 되어서도 '노여움만 많은 노인네'가 되어 평생을 따라다닌 나의 유리멘탈을 탄식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