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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ylor L Aug 23. 2019

할머니의 밥상

임술년 개띠가 기미년 양띠를 이해하는 방법

“자신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혹은 여성이란 무엇인지, 남성이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된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하는 사람? 있다면 어떤 계기였는지 공유해보면 어떨까?”



젠더에 관한 토론수업 중에 교수님이 던진 질문이다. 미국의 명문사립대를 졸업한 전형적인 상류층 백인 여성인 교수님은 어릴적 어머니가 ‘교양있는 여성이 사용해야 하는 언어’에 대해 가르치던 순간이라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왜 오빠가 아닌 나에게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건지 되짚어보면서, 처음으로 오빠와 자신의 성별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교수님은 덧붙였다. 멕시코계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나온 8남매 중 넷째인 한 친구는, 자신의 바로 아래 남동생이 어릴적 여자옷을 입고, 여자 구두를 신으려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벼락처럼 화를 내는 순간이었다고 떠올렸다. 자신과 얼굴이 가장 닮았던 남동생이 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지만, 아버지가 “남자녀석이 왜?”라며 동생을 꾸짖는 모습을 보면서, 남자옷과 여자옷은 다르고, 남자란 ‘여자옷을 입으면 안되는 사람’이라고 막연히 깨달았다고 말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미국 학생들이 저마다의 기억을 앞다투어 공유하는 동안 나 역시 기억 속을 헤집어 그 순간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그것이 첫 순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이 꽤나 혼란스러웠던 어린 날의 한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삼남매에 할머니까지 모시고 살던 우리집은 여섯 식구로 늘 북적였다. 식사를 한 번 하려고 해도 밥공기와 국그릇만 해도 12개였으니 수저와 밥, 국만 올려도 이미 한 상이었다. 엄마는 결혼 이후 줄곧 일을 했기 때문에 웬만한 집안일과 살림은 할머니가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밥상을 차릴 때면 언니와 나는 늘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수저를 놓고, 밥과 반찬을 나르곤 했다. 할머니가 밥을 푸거나 국그릇을 건네는 순서는 대개 같았다. 아빠가 제일 먼저, 그 다음이 남동생, 그 이후로 할머니, 엄마, 언니, 내 순이었다. 가끔 뒷 네사람의 순서는 뒤섞이기도 했지만, 아빠와 남동생으로 이어지는 순서는 늘 한결 같았다.



할머니의 상차림에는 순서 말고도 할머니만의 '원칙'이 또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아빠밥'은 뭔가 특별하다는 것이다. 일단 밥을 담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고르고 골라 뚜껑과 그릇에 모두 한자로 '복' 자 문양이 있던 커다란 밥공기를 샀고, 거기에 방금 지은 새밥을 가득 담아 아빠에게 주곤 했다. 민무늬 사기그릇에 담긴 다른 사람들의 밥과는 모양새부터가 달랐다. 어린 나는 아마도 궁금했던 것 같다. 왜 아빠밥만 특별한 걸까. 웃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국민학교 입학도 전에 동네 노인정에서 운영하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면서 귀에 닳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빠에게 웃어른인데, 할머니가 아빠를 공경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린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1남 2녀 중 둘째였던 나는 눈치가 꽤 빠른 아이였다. 어쩐지 할머니에게 그것을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근질근질한 입을 꾹 다물고는 차마 묻지 못했다. 하지만 아빠밥에 이어 또다른 '신상' 밥공기가 상위에 놓여졌을 때, 그것이 남동생의 밥그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 왜 아빠랑 쟤 밥만 달라?"


단순히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어조였는지, 설명할 순 없지만 뭔가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다소 울분에 섞인 목소리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후자였을 것이다. 아빠는 적어도 나에게 '웃어른'이었기 때문에, 할머니와 아빠 사이의 미묘하게 전복된 권력관계는 이해하긴 힘들었어도 마땅히 따질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나보다 아랫사람인 남동생이 아빠 다음으로 '서열 2순위'라는 점은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간 노골적으로, 또 암묵적으로 겪어야 했던 둘째딸의 설움까지 곁들여진 나의 울음섞인 물음에 할머니는 너무도 태연히 대답했던 것 같다. "아빠랑 xx는 남자잖아." 마치 당연히 정해진 정답이 있는데 너만 여태 그걸 몰랐냐는 듯이.



그제서야 그동안 할머니가 아빠 다음으로 동생의 밥을 푸곤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랬다. 할머니는 처음으로 나에게 남성이란 '나이나 지위 고하에 무관하게 여성보다 먼저 밥을 먹어도 되는 사람, 여성과는 다른 그릇에 밥을 먹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왜 남자는 그래야 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할머니는 무심하게 '남자니까'라는 순환논리로 되받았다. 다시 받아칠 언어가 부족했던 당시의 나는, 서러웠지만 그쯤에서 씩씩거리며 입 속에 밥을 밀어넣었다.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진 '여성'이라는 이름을 마음 깊이 원망하면서.



학교에 들어가고 내가 반박의 논리와 언어를 갖게 된 뒤에도 비슷한 다툼과 갈등은 반복됐다. 그렇게 10대, 20대를 지나는 동안, 이런 사고를 가진 할머니와 나 사이에는 애증의 관계가 싹트고 여물고 또 시들어가기를 반복했다. 할머니의 성차별적 사고에 동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처음으로 할머니를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하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이었다.



그해 봄, 그토록 정정하던 할머니는 점점 기력을 잃어갔다. 처음에는 노환이려니 하고 병원을 찾았던 우리 가족은 의사로부터 할머니의 몸 속에 암이 자라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담도암.' 낯선 병명 만큼이나 의사가 내린 진단의 무게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사 취업을 준비하면서 이른바 '백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연히 할머니의 간병은 내 몫이 됐다.



간이 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새벽이면 회진을 도는 의료진들의 발자국 소리에 잠을 깨는 날들이 하루, 이틀, 일주일, 계속해서 이어졌다. 할머니의 병은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번엔 할머니가 다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머리로 깨닫고 있었다. 주삿바늘로 멍이 든 할머니의 팔목과 링거병,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던 내 눈에, 문득 병상카드에 적힌 '88세'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칠순잔치, 팔순잔치를 하는 것을 보면서도 할머니의 나이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할머니였다. 처음으로 나와 할머니의 나이 차이를 헤아려봤다. 63년.



국사책에서나 보던 3.1운동이 일어난 기미년, 1919년에 할머니는 태어났다. 일제시대를 겪었고, 광복이 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었고, 전쟁통에 새 남편을 만났다. 새로 시집간 남편의 집안은 손이 귀했다. 남편은 3대 독자였고, 할머니는 다행히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데 성공했다. 그 귀하디 귀한 4대 독자가 우리 아빠였다. 하지만 아들이 11살이 되던 해, 두번째 남편마저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딸들까지 자식이 넷이었지만, 할머니는 늘 아버지의 그늘을 가지지 못한 막내 아들이 애처로웠을 것이다.



그런 아들이 스물 일곱이 되던 해 혼인을 해 첫 딸을 낳았다. 첫 딸은 살림밑천이라며, 그럭저럭 만족했다. 하지만 3년 뒤 나온 둘째마저 딸이었다. 할머니는 조급해졌다. 5대 독자는, 엄마에게 떨어진 지상최대의 과제였다. 불과 15개월 뒤, 절박한 엄마와 간절한 할머니의 부름을 받고 내 동생이 태어났다. 할머니가 살아온 세월을 거슬러 헤아려보니 처음으로 어렴풋이 할머니를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세계에서 4대 독자인 아들과 5대 독자인 손자는 삶의 모든 기준이었고, 바라보기도 아까운 존재였을 것이다. 손녀딸과 며느리가 미워서 부러 밥을 뒤에 푸고, 남은 찬밥을 그들에게 주었던 것이 아니라, '대를 이을' 남성에게 헌신하는 것이 할머니에겐 수십년간 내면화된 삶의 지침이었던 것이다.



'출생의 순간부터 환영받지 못한 아이' 라는 피해의식 혹은 상처를 가슴 깊이 안고 있던 내게, 할머니의 '왜'를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내 삶과 화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됐다. 할머니는 결국 그 해 가을을 넘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 사이 나는 기자가 됐고, 결혼을 했고, 뒤늦게 학업에 뜻을 품고 신문사를 뛰쳐나와 미국으로 건너왔다. 태평양 건너 미국의 강의실에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던 나는, 내가 처음으로 밥상에서 여성과 남성의 정체성을 서럽게 깨우치던 날의 이야기를 굳이 공유하지 않았다. 미국 친구들에게 이 모든 맥락과 역사를 이해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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