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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Oct 23. 2023

불현듯 다가 온 시골 버스 여행

사람이 좋아지는 자리




망설임은 아주 잠깐이었다. 목적지를 두어 역 앞에 두고 기찻길옆 바다를 끼고 있는 역에 내려섰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규칙적인 파도 소리와 저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앉아있고 싶었다.

진한 커피 한 잔과 바다.  목적지 까지는 버스를 타면 될 것이다.




하룻밤, 아픈 친지를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바다가 함께 있는 고장. 해결해야 할 많은 일들에 휩싸여 있는 날들이어서 일까.

바다를 생각하며 가는 기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커피가 당신의 곁에 있는 입 무거운 친구 같다는 어느 작가님의 글을 읽다가 불현듯 바다를 앞에 둔 커피 한 잔이 절실해졌다. 기차는 곧 철길 바로 곁에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에 도착할 것이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바다를 바라다보았다. 아무도 곁에 없으니 누구와도 이야기 나누지 않았건만 마치 다정한 말을 서로 주고받은 듯 마음의 짐은 어느덧 씻기어져 갔다. 하늘과 구름, 바닷새, 끊임없이 속삭이는 파도, 바다는 살아있는 생명체인양 친구가 되어 큰 위로를 내게 전해 주었다.


바닷가를 떠나 목적지로 가는 . 버스를 타 본 것은 처음이었다. 기차를 타면 나타나고 숨곤 하던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도로였다. 차로 몇 번 다녀본 길이었지만 안내방송을 들으며 가는 길은 마치 새로운 길을 가는 것과 같았다. 친절하게 알려주는 정류장의 이름들을 들으며 과거 그곳에 머물렀던 어느 시간을 떠올렸다. 때론 가던 길 잠시 쉬어 갔거나 해수욕장에 들렀거나 관광차 들렀을 것이었다. 그 작은 마을들이 나란히 자신의 이름표를 내게 보여 주어서 나는 그 시간들을 기억하며 느리게 가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천천히 걷는 뚜벅이 여행자의 시간과 닮은 시간을.




친지의 집은 도시의 외곽에 있어 택시를 타거나 다시 작은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잠깐 시장에 들러 구경을 하고 지방색이 뚜렷한 메밀전병을 두 팩 사들고 버스를 타기로 한다. 아직 사십여 분이 남았다.


시골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아주머니가 세상 순수하고 환한 미소로 내게 불쑥 말을 건넨다. "어디 가는 버스 기다리시오?"

"ㅇㅇ 갑니다."

잠시 후 그분께 물어보지 않았어도 나는 그분이 가시는 곳도 버스 도착 시간도 알게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밭에서 일하고 나서 아픈 눈 치료하러 병원에 왔더니만 버스시간이 잘 안 맞는구먼."

 " 시간도 훨씬 넘게 기다리셔야 하는데 지루하셔서 어쩐데요?"  

괜찮으시단다. 느린 것에 익숙한 밝은 얼굴은 아픔을 넘어서 있는 듯하다. 같은 모양의 파마머리들을 하고 전선줄 위에 앉은 참새들처럼 정류장 벤치 위에 나란히 앉아서 서로 다정하니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어른들의 모습이 서로 정답다. 금세 서로가 친구가 되는 자리다. 대부분이 손톱에는 때가 묻고 옷차림은 허름해도 따뜻한 눈빛은 한없이 맑고 수수한, 이들의 일상 이야기를 엿듯고 있노라니 참으로 정겹다. 사십 여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속에 물들어 있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야기 속에 발들이고 나도 크게 하하 웃게 되었다. 그것이 내게 꽤 큰 로가 되어 다가온다. 고단한 일상도 훌훌 털어내고, 힘든 삶도 그러려니 친구 삼아 잊고 사시는 그들의 일상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작은 근심들도 내려놓게 된다.

박월, 모전, 어단. 낯설지만 정겨운 이름을 단 버스가 꼭 그런 이름을 닮은 어른들을 싣고 떠난다.


할머니 한분이 정신없어 장 본 보따리를 두고 오셨다며 왔던 길로 허둥지둥 나가셨다. 떠난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할머니의 다른 보따리 곁에서 나란히 앉아 계신 다른 할머니들이 그분이 버스에 늦을까 봐 찾으러 가서 아직 오지 않는 이를 걱정하고 있다. 한참만에 헐떡이며  할머니가 간은 겸연쩍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들어서자 동시에 "하아 다행이여."라는 합창소리가 들린다. "병원 들렀다 산 감기약이든 봉투를 기름집에 두고 왔지 뭐요. 아이고 참 내정신도. 지난번에는 장 본걸 고기 간에 두고 왔더니만.."

"그러기 십상이지요. 나도 그랬다오."

여기저기서 동조하며 건네는 말이 할머니를 위로한다.

"그저 메고 다녀야 하는데 그게 마땅찮아서.. 참".


버스가 도착하고 짐을 찾으신 할머니와 함께  한 무리의 어르신들이 떠나고, 다시 내가 떠나기까지 남은 어르신들은  새로운 그룹을 이루고 서로 간에 다정한 이야기를 끝없이 나누리라.


때로는 바다처럼 말없이 손 잡아 주는 시간이 나를 위로한다. 사람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힘을 깨워주는 시간이다.

순수한 사람이 건네는 별 뜻 없는 다정한 눈길이 모여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사람들로부터 숨고 싶었던 마음은 희미하게 바래어지고 사람이 다시 좋아지는 자리다.

바다와 함께, 시골 버스를 기다리고 타는 이 짧은 사람 여행이 느리게 걷는 뚜벅이 여행과 참 많이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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