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모 여행기를 읽으며 여행은 사람에게 삶을 잘 가꾸어 내는 거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 본 그의 글에서부터 최근의 글로 이어지며 깊어지는 그를 느낀다.
가끔 나에게서 잠시 벗어나는 일에 대하여 생각했다. 진부한 일상에 매이면 당연해져서 놓쳐버리곤 하는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다 찾은 시골의 작은 책방에서 그의 책과 다시 만났다.
홀로 이루어내는 진정 오랜 여행은 분명 사람에게 지혜를, 삶에 대한 남다른 눈을 뜨게 하는 모양이다. 낯선 곳, 사람들 속에서 함께 한 여행자만이 얻을 수 있는 눈, 때론 우울한 이전의 그에서 언뜻언뜻 발견했던 반짝임 들을 이후의 책들 여기저기에서 발견하고는 그의 글을 모두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차례차례 그의 책들을 연도 별로 정리해 본다. 한 작가의 책을 발행 순서대로 읽어 보는 일이좋은 여행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구하기가 어려워서 언젠가로 그 여행을 미루어 둔다.
-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2013), 함부로 사랑하고 수시로 떠나다 (2020)
훈자에서 만났던 젊은 의사지망생이 막 병원을 그만두고 그를 만나러 온 날의 에피소드를 읽었다. 그 글은 나 스스로가 나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내가 가질 수 없는 것 그런 것을 가까운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간혹 세상에서 얻는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서 잠시 벗어나는 일. 그것이 온전히 자유가 될지 또 다른 구속이 될지는 확인해 봐야 알 수 있는 것. 그 자유를 그는 다시 연습하고 싶었을 것이다.
얼마나 고민했겠는가, 스스로가 스스로를. 얼마나 다짐했겠는가, 자기가 자기 마음을. 어차피 사는 동안은 자신이 자신에게 가장 큰 지지자여야 하며, 자신이 자신에게 가장 결정적인 결정권자여야 한다. 그래서 자신을 다독이고 자신에게 박수도 쳐야 할 것이다.
......
그대 마음을 행하라!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을 그대의 의지대로 행해도 세상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어느 날, 많이 달라져 있는 당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진심이라면, 그럴 것이다.
(p308~309)
여행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다스리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몸의 여행이 마음을 만드는 것이다. 대륙을 건너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이방 저 방 자유롭게 건너며 다스리는 일에 익숙해지면, 어디라도 두려워할 일이 없다. 혼자라도 외로울 일이 없으니 어디든 떠날 수 있다. 각자가 살아온 만큼의 경력을 인정받는 여행자이다. 모두가 이미 오랜 여행자이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홀로 여행자였다.(p16)
홀로 걷는 길에서 누군가 말을 건 적 없지만 침묵하지도 않았다. 여행자들은 대부분 없는 말로 걷다가 그 말들을 주워와서 살아간다. 정말로 중요한 말들은 내가 나에게 일러준 말들이다.(p74)
나와, 일상의 나에게서 잠시 돌아서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새로운 나를 찾아본다.
우리라는 것에 집중하다 미루곤 하는 굴레에서 벗어나 시간을 내어 일없이 순환 버스 여행을 하기도 하고 한 개의 벤치만이 있는 조그만 공원에서 홀로 책 한 권과 커피 한잔을 즐기기도 한다. 반듯함을 버리고 때로는 어수선함도 받아들여 본다. 아주 작은 것에서라도 벗어남이 주는 작은 자유들, 오히려 나다움은 거기서부터 출발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소소하지만 좋아하는 아주 작은 일에 나를 맡기며 스스로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나와의 데이트는 참으로 달다.
- 당분간 나는 나와 함께 걷기로 했다(2022)
코로나에 묶여 어쩔 수 없이 여행을 멈추게 된 작가는 생각까지도 병들어가는 듯한 자신을 추스르려 밀양 아주 작은 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작은 시골집 처마 밑에 '무작정'이란 문패를 매어달고.
낮은 지붕 아래서 아무 계획 없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 앉아 세상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각자의 길을 떠나는 그런 꿈을 꾸며 써 내려간 이야기다. 여행작가인 그에게도 이 여행은 새롭다. 초보 여행자의 마음으로 그는 새로운 여행을 배운다.
그 여행을 통하여 그는 일상 속에서 아주 느린 걸음으로 자신의 여행길을 돌아보고, 혼자만의 여행의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를 내 안의 나를 펼쳐놓고 어루만지며 살아간다. 꼭 여행은 먼 나라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함께 걷는 일임을 주변의 나무와 자연과 촌로들을 만나며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임을 배우고 그 길에서 그는 다시 세상을 향해 배낭을 멜 큰 힘을 얻는다.
시골로 이사하면서 책들을 버려야 했을 때, 퇴출 1순위는 여행기였다. 일상에 묶여 도망치고 싶을 때, 더 멀리 훌훌 날아가고 싶을 때 내가 지닌 열망의 표현인 나의 여행기들. 내가 제일 먼저 버렸던 것은 조금은 무모할지도 모를 나의 열망들이었다. 여행책방에 기증한 몇 권의 책들 속에 있던 그의 책. 작가의 지인 이라던 책방지기는 너무도 그 책을 반가워했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일어서기 위해 또 여행기를 샀다.
이제는 낯선 시골에서 손님처럼 드나드는 것이 아닌 주인으로 살고자 익숙함을 다시 배우는 날들이다. 하루하루를 잘 살고 싶어 애쓰는 나에게 그의 다정한 말들이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그 어떤 말보다 힘이 되어 주는 같은 처지의 말없는 위로, 그 따뜻함이 주는 위로를 배운다.
다시 만난 변종모의 글들이 나의 마음을 꽉 채워주곤 한다. 그래서일까? 홀리듯 읽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고 아끼며 조금씩, 생각을 나누며 천천히 책을 읽는다.
어느 순간 나는 그의 글 속에 푹 빠져 있다. 글을 읽다 메모해 둔 글을 읽다 보니 출처가 분명치 않은 메모가 있다. 그의 글에 스며들어 내가 쓴 글인지. 그의 글인지 모를. 그 한 줄이 마음에 든다. 그렇게 먼 그는 아주 내 가까이에 있는 또 하나의 내가 되어 있다.
꼭 잡고 있었던 예쁜 풍선을 놓아야 할 때도 있다. 그래야 두 팔은 자유롭고 어디든 휘저으며 달려갈 수 있으니'
작은 메모 노트의 그 글이 내게 용기를 전해준다.
요즘 틈틈이 주변을 마치 여행하듯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고 싶다는 내게 글 친구가 남긴 "생활 여행자시군요"라는 말이 나는 참 좋다.
생활여행자가 되어 나를 이끄는 것들을, 장소를 찾아야겠다. 그가 밀양의 마을 구석구석 숨겨진 곳들을 여행자로 찾아가듯이. 언젠가는 스며들듯 익숙해진 이곳의 생활이 그리워져서 언젠가 어느 곳일지 모르지만 그곳에서도 여기 이곳의 풍경 하나하나를 그리워하며 떠올릴 수 있도록.
그의 글들이 참 좋다.
나는 오늘도 노트 한가득 그의 글들을 옮겨 쓰고 떠오른 나의 생각들을 찬찬히 적어 내려간다.
당분간 나는 나와 함께 걷기로 했다. 이 계절엔 나만 생각하면서, 내 모든 것을 이곳에 꺼내 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며 상처 난 부분을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부분은 더 자세히 보연서 살아가려고 한다.(p89)
사람들 사이로 걷다가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앉아,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 여행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며. 주전자에 물을 올린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수증기, 갑자기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몸과 마음을 일깨운다. 젊고 씩씩한 여행자가 달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베란다에 앉아 오래도록 밤을 지켰다. 우리 사이에 놓인 찻잔은 가진 것 없는 여행자들의 언어다. 말을 나눌 방법이 없지만 차 한잔을 핑계 삼아 며칠 동안 달의 크기가 바뀌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여행자는 그럴 수 있다. 위로의 언어는 없었지만 서로에게 위로였던 시간. 준 것은 없지만 받은 것이 많은 이유는 같은 처지일 때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p96~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