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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Apr 05. 2020

나의 아주 오래된 거짓말

- 날개를 달아 준 선생님

살면서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한 거짓말 중에서 최고의 거짓말은 깨끗한 마음을 지닌 소녀 시절, 좋아하던 선생님께 한 것이다.  50여 년 전의 일이 아직까지도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가장 오래된 최고의 거짓말 임에 틀림없다.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다) 5학년 학기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회시간이었다. 각 도의 대표적인 지명에 관하여 배우고 있었다. 평안북도 강계라는 곳에 대하여.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곳이 특히 미인이 많은 곳이라는 선생님 말씀은 기억난다.

"혹시 누가 부모님 고향이 강계인 사람이 있니?"

선생님 질문에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아버지 고향이 강계입니다"(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다. 단지 예쁜 것을 부러워했었는지 아니면 선생님 눈에 띄고 싶었는지(그런다고 예뻐지는 것도 아니요 눈에 띌 것도 아닌걸 그땐 몰랐을까?).


당시에 내게는 상처가 있었다.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잘 사는 집 아이와 가난한 아이들을 많이 차별하셨고 그 차별은 도를 넘었다. 마지막 종업식날 우등상을 받아야 할 나 대신 어이없게도 평상시 늘 더 못하던 친구에게 상을 주신 것이다. 부모님이 기성회 일을 하던 친구였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상장은 아이에게, 상품으로 나온 노트 묶음은 나에게 주셨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이제 조금씩 철이 들어가던 나이라 너무도 속상하고 화가 났다. 집에다 가방을 내팽개쳐두고 산으로 올라가 한참을 혼자서 울었다. 선생님이 미웠고, 바쁜 엄마와 아파서 누워 계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언니나 오빠들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당시의 가정환경 조사서는 집에 티브이가 있는지 까지도 조사하던 시절이었다. 교무실에 가서 생활 기록부만 보면 금방 들통이 날 거짓말을 깜찍하게 하고서 잘 대답했다는 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그 이후 나는 오 학년 내내 선생님께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에 만난 새 선생님

웃으면 눈가에 보기 좋은 주름이 지던 선한 모습의 선생님을 만났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때의 선생님께서는 2년제 교대를 졸업하시고 첫 부임을 하셨으니 갓 스무 살 나이였을 것이다. 과학실험 기구를 직접 우리와 만들고,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등 참 열정 넘치는 분이셨다. 아주 재미나게 수업을 진행하셨던 듯하다. 그 옛날 자연 시간에 가르쳐주신 바람의 풍속의 변화와 그에 따른 현상을 랩처럼 외우게 하신 것을 지금까지도 기억할 수 있는 걸 보면.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님이 좋았던 점은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늘 똑같은 사랑을 주셨던 점이다. 4학년 내내 잘 사는 집 아이를 편애하시던 선생님과의 일 년이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때, 나쁜 기억으로 인해 약간은 의기소침해있던 때 선생님과의 시간은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나는 다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책을 좋아하게 된 것도, 전공을 이과로 택하게 된 것도, 웅변을 하게 되어 많은 이들 앞에서 당당히 말하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도 선생님을 통해  얻게 된 것들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교내 웅변대회를 나가기 위해 너무 연습을 해서 목이 쉰 나를 위해 날달걀을 챙겨다 주시고 당신의 도시락을 먹이시던 선생님이 기억난다.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고 졸업식 날 재학생 대표로 송사를 읽게 되었다. 날이 몹시 추워 꽁꽁 언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아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단상에서 나는 너무 창피해서 울면서 송사를 읽었고 졸업생 거의 모두가 울어 눈물바다가 되었던  그날의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 최고의 기억이다.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나의 어린 마음을 선생님께서 잘 헤아려 주셨는지 한 학년 동안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나는 저학년 때 다른  선생님께 받았던 상처를 회복하고 자존감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5학년이 끝나고 받은 나의 통지표에 선생님께서는 '사고력이 풍부하다'라고 표현하셨고 어린 나는 그것을 사고를 친다는  뜻으로 알고 선생님께서 내 거짓말을 알고 계셨나 보다 생각하고 몹시 힘들어했다. 


일 년 만에 선생님께서는 우리 곁을 떠나시게 되었다. 그  이후 선생님께서 즐겨 부르시던 섬집아기 노래를 부르며 교정 한구석에서 슬퍼 울던 기억이 다. 아직도 그 노래는 내가 좋아하는 동요이다.


-다시 선생님을 만나다.

대학에서 다시 선생님을 만났다. 4년 제로 교육대학의 학제가 바뀌면서 2년제 교대를 졸업하신 선생님들을 교육시키는 첫 프로그램이 방학중에 열렸다. 그 강좌를 진행하시던 교수님께서 실험 파트를 도와 달라고 요청을 하셨다. 장난기 넘치던 교수님은 혹시 초등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는 선생님을 확인하시고 나의 이야기를 수업 중에 하셨단다.

그 강의실 앞에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도 나도 금방 서로를 알아보았다. 주변의 다른 선생님들도 우리들 이야기를 들으셨던 터라 곁에서 웃으시며 기뻐들 해 주셨다. 선생님의 밝은 미소는 여전하였다.


선생님을 모시고 저녁을 대접해 드렸다. 딴에는 최고의 양식 집에서.

그 부끄러운 거짓말에 대하여는 그날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선생님과 헤어졌다.

당시만 해도 연락할 방법이 지금처럼 많지 않아서인지, 젊은 나이여서 였는지, 바쁜 일상 속에서 사느라 그랬는지 그 이후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어린 시절 1년의 선생님과의 시간과 단 한 번의 만남이 50여 년이 지났음에도 어찌 이리 생생한지.....


시간이 지나 늘 선생님을 생각하면 그날 사드린 메뉴도, 다시금 연락하지 않았던 것도 늘 가슴 한편에 앙금처럼 남아 있다. 다시 만나 뵌다면 이젠 나이 드신 선생님을 위해 부드러운 전복죽이라도 함께 나누면서 이야기하고 싶다. 멋진 바다가 보이는 찻집으로 모시고 가서 따뜻한 차 한잔도 나누고 싶다. 나이가 드니 더 늦기 전에 선생님을 한번 더 뵙고 싶어 진다.


선생님은 아실까?

철이 들어가면서 만난 어른에 대한 첫 번째 신뢰가 무너졌던 그때,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부정적인 아이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사랑과 신뢰가 필요했던 시간에 사 학년 담임선생님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나에게 주었는지.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새 날개를 달아 주신 셈이다.

그 날개를 펴고 나는 훨훨 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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