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샛별 Oct 12. 2020

내 마음의 풀을 매며

나를 위로하는 시간

두 달을 그곳을 떠나 있었다.

내 꽃들은 얼마나 자랐을까.
이주 정도만 지나도 풀숲을 이루던 잡초들처럼 잘 자라나 꽃을 피웠을까?


기차 창가에 앉은 나와 함께 많은 생각들이 같이 그 길을 달린다.






하우스의 풀이 한 달 만에 작은 숲이 되었다.

잡초들을 뽑아내다가 잠시 숨을 고른다.

내가 키우는 작물들 보다 더 큰 잡초들.

지난번 밭을 맬 때는 아주 작은 아이들이었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이거나 더 작아서 아주 보일 듯 말 듯하던 풀들이 혼자 힘으로 부쩍 자라나 있다.

우리가 원치 않아서 이들을 걷어 낼 뿐 이 풀들 또한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 텐데.

소득에 큰 중점을 두지 않는다면 적절한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 견제하며 자라면서 더 흙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잡초와 작물이 함께 크는 농법이라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뽑아야 할 잡초가 많으니 그들을 들어내다 버리기가 힘들어서 잘게 잘라 그 자리에 덮어주는 풀 멀칭을 한다. 덮인 풀들이 다시 잡초가 나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주게 될 것이니 일거양득이다.


풀을 매면서 작지만 많은 생물들을 만난다. 메뚜기도, 무당벌레도..

꼭 작물들만이 나란히 늘어선 밭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그런 마음을 버리고 싶다. 무당벌레도 살고, 달팽이도 깃들고, 지렁이도 함께 깃드는 그런 밭이면 어떨까. 남편이 들으면 기겁을 할 생각이다.

잡초가 우거진 밭에서 풀을 매면서 그들의 세상을 내가 마구 뒤흔들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몸이 알아서 풀을 매고 있다.

그저 내 앞에는 풀과 작물뿐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와 바람소리, 때로 내리는 빗소리뿐 주위는 고요하다.

이곳의 농사일을 하시는 많은 분들은  일을 하며 큰 소리로 라디오를 틀어놓곤 한다. 무료해서란다. 우리 하우스에도 라디오가 각 동마다 설치되어 있어 다른 이들과 함께 일을 할 때는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하하호호" 라디오 속의 사람들이 열심히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한다. 농사일을 하는 분들 중에 방송에 참여하는 이들이 많구나 하고 느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없이 혼자 일을 할 때는 라디오를 끈다.

내게는 그 소리가 대형마트 안에 있는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고, 낯선 여러 사람들에 둘러싸인 기분이 들어서 불편하기까지 하다.

혼자 묵묵히 새소리 나 바람소리를 들으며 일할 때가 참 좋다.  

마음은 고요하고 내가 그  자연 속의 한 부분이 된 듯하다.

그 고요가 좋다.

그 속에서 일하는 시간을 사랑하는 편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어느새 이랑의 끝에 다다랐다. 뒤를 돌아본다.

잡초 숲은 사라지고 정연하게 산마늘이 제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정연함 또한 아름답고 흐뭇하다.




그렇게 흙을 만지며 위로받고 좋아하던 나였지만 지난 두 달간 그곳을 떠나 있었다.

그 밭보다 내 마음밭이 황폐해진 탓이다. 아직 농사일이 서툴기만 한 나에게 쉼이 없는 일들은 점차 나를 지치게 했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일을 하느라 거기에 매달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사라진 마음의 여유 자리에 슬금슬금 우울감이 밀려 올라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곳에서는 누구에게나 당연할 수도 있는 일들이  아직 적응하지 못한 아니 다른 방식으로 적응해야 할지도 모르는 나에게는.

꾹꾹 참고 그 시간들을 견디다 보니 송곳처럼 날카로워진 마음은 소한 말에도 상처를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해야 할 일을 겨우 마치고 도망치듯 시골을 떠났다.

돌아와 며칠 뒤 글 하나를 올렸다.

꽤 긴 시간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 쓴 그 글 속에는 불평과  슬픔이 가득했다. 끊임없이 나를 다독거렸건만 그들은 아우성치며 글 속에 흔적을 남겼다.

시간이 지나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어 가면서 다시 그 글을 보았다. 글을 읽을 때마다 그 순간들은 여지없이 되살아났고 점차 부끄러워졌다.

결국 나는 그 글을 내리고 말았다.

마음은 여전히 우울했다.


한 달을 보냈다. 우울감은 꽤 오래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브런치에서 글 하나를 읽었다.

추세경 작가의  '신촌에 버스킹이 내리면'이라는 글이었다. 버스킹 하는 도중에 가수 크러쉬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작가가 남긴 글이었다.

지치고 힘든 마음과 좌절하는 시간도 살아가는 일부다. 희망을 노래하고 긍정의 언어를 말하는 것도 좋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부정적인 마음들도 소중히 다뤄야 한다. 크러쉬가 눈물 흘린 이유도 그런 감정 때문이지 않을까. 잘 버티고 잘 참아왔어도, 타인은 알 수 없는 자기만의 고단함, 그런 게 있었을 것이다.

가수도 작가도, 성공한 사람도 그러지 못한 사람도,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살아가는 불안과 삶의 고단함을 받아들이고, 그때 느끼는 불행함과 우울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조건적인 긍정과 무조건적인 희망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을 직면할 수 있는 힘, 그것을 온전히 받아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 추세경 작가의 글 속에서


 자주 보던 프로그램이었지만 보지 못했던 눈물의 현장을 담은 영상을 작가의 글 속에서 보며 나 또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무엇이 내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인지 명옌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아직도 답을 내릴 수 없네
자신 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 god의 '' 가사 중에서



노래의 가사 구절구절이 나의 마음을 울렸다.

가요 노래 가사에, 마음이 이리 젖어 들 수도 있구나... 무뎌진 나의 마음이 이렇게 무너질 수도 있구나... 글 속에 답답한 마음을 표현했던 나를 부끄러워 하기보다 안아 주었어야 하는 거였는데..






대부분의 내  나이 때의 사람들이 살던 방법대로, 지금까지의 나는 나보다는 항상 가족이나 남편에게 맞추어가며 살아왔다.

나만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슈퍼우먼이 되어야 했고, 상황이 나쁠 때는 때는 나의 일을 놓아야 했다. 다시금 일을 할 여건이 주어지면 뒤쳐진 것을 메꾸느라 무너진 자존감을 일으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며 나를 다독이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삶이 후반기로 향해 가는 길이다. 입술을 깨물며 참고 살아갈 만큼의 큰일은 무엇일까? 

이제는 하고 싶던 일들 소소한 나의 행복 찾기를 시도하고 싶은데. 어린 시절 배우던 악기도 다시 배우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가보고 싶던 곳을 편한 마음으로 여행도 하고.

그렇게 이제는 나답게, 나로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우선 나를 돌보아야 다. 두 사람의 삶을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돌보아야 했다. 내 시대의 살던 방법대로 그저 남편에게 맞추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선 나를 위로하는 것이 먼저였다.

남편은 진정으로 농사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점을 인정한다면, 그 일을 택하면서 따라오는 짐을 그는 혼자서라도 감내해야만 한다. 내가 '그의 아내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꼭 함께 해야 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는 을 나에게 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그 일과 친구들과 사람들을 만나는 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지만, 나는 나만의 시간을 좋아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만약 서로 간에 전혀 다른 삶의 기준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면 각자의 생각이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그저 한쪽의 양보가 아니라 함께 생각했어야 할 일이다. 타성에 젖은 사고를 우리 함께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두 달의 시간은 내게 불평이 아닌 나의 의사를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어서 빨리 그곳에 정착하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서서히 나를 적응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두 달을 그냥 나로 살았다.


내 마음밭을 돌아본다.

마음속 복잡한 상념들도 처음에는 그 잡초처럼 아주 작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들이 의심이나 불평을 양분 삼아 이렇게 자라나 우울의 이룬 것이다.

좋은 생각들이 자라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처음 한 달가량을 남편을 원망하고 나 자신을 괴롭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녹은 쇠에서 나온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어 버린다'

마음씨가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는 뜻이라고 한다.

법정스님의 글을 필사하다 본 글이다.

내 마음을 살펴주지 못해서 나를 힘들게 했던 나.

풀만 뽑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  불평이 자라나고 있음을  보았어야 했는데...

그 불편함이 자라나 나를 그늘 지우지 않도록.. 나를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였구나.


비교적 일이 적은 시즌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돌보는 긴 쉼의 시간을  가졌다.

아직도 나는 제대로 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급하게 답을 찾기보다는 조금 천천히 나를 돌보면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늘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가지리라!


두 달만에 추석을 맞아 시골로 내려가는 도중에 바다에 들렀다. 

세찬 파도가 치는 바다.

홀로 앉아 바라보던 바다의 세찬 움직임이 내게 힘을 전해 준다.

힘들어도 나로 잘 살라고...


그리고 돌아온 시골에서

심기만 하고 돌보지 못한 나의  꽃들과 반갑게 만났다. 비록 죽어버리거나 겨우 살아난 것도 있지만, 색색이 피어난 키 작은 백일홍이 하우스를 정겹게 느끼게 한다. 잎만 무성한 데이지는 내년에나 예쁜 꽃을 피울 것이다.

긴 장마로 인해, 비록 몇 송이일 뿐이지만 피어나 나를 기다려준  꽃들이 참으로 귀하다.


그렇게 또 조용한 시골의 하루를 살았다.




Main Photo: by Griffin Wooldridge on Unsplash

Photo: 정동진의 어느 날 ( 핸드폰으로 촬영한 사진)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사는 고향과 첫사랑이 닮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