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 첫 꽃을 마주하며

첫사랑을 배우던 그날처럼

by 샛별





가뭄 끝 기다리던 단비가 내렸다.

다음 날 오후 나선 산책길에서 생각지도 못한 봄꽃들을 한꺼번에 만났다.


오랜 겨울 가뭄이었다.

유난히 눈이 적게 내린 겨울이었다.

비가 개인 다음 날의 산책길. 왠지 숲에도 길가에도 흐린 연두 빛 색감이 묻어 나는 듯 느낀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성당 묘지 곁을 지나며 마른 잔디가 깔린 무덤들을 보며 걷다 곧 잔디가 푸르러지는 날을 그려보았다.

비 갠 언덕 위 풀빛 푸른데
남포로 님 보내는 구슬픈 노래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불현듯 고교 시절 배운 한시가 생각난 것은 푸르러지는 언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북한강이 흐르는 춘천의 공지천 그리운 언덕이 떠올랐다.

내게 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오래 봄을 잊고 있었나 보다.

늘 바쁘던 살아야 했던 젊은 날엔 어느 날 문득 봄이 나의 눈앞에 불쑥 다가와 있곤 했다.

조금은 여유가 생길 나이에는 어른들의 병환으로, 남편이 하우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로는 농사일로 꽃이 피기도 전 하우스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 문득 밖을 나서 보면 봄이 어느새 짙어져 있었다. 가장 바쁜 시즌을 보내고 도시의 집으로 돌아오면 봄날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올해는 코로나 탓에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고 시골을 가는 일도 하루하루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나선 며칠간의 봄 산책길이었을 것이다. 아직은 겨울의 냄새가 가시지 않은 숲.

오랜만에 봄을 제대로 기다리는 마음이 설렌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놀던 어린 소녀 시절을 지나 처음 내게 찾아온 가슴 설레던 짝사랑이 움트던 연분홍빛 시간들처럼.

마스크만 쓰지 않고 집을 나설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선 길이었다.


일주일 전 습지 곁 덤불숲에서는 며칠 동안 새들이 시끄러우리만치 재잘재잘 대고 있었다. 수 십 마리의 새들이 덤불숲을 오르내리며 지저귀고 있었다.

새소리가 봄이 우리 곁으로 오고 있음을 일깨워 주는 듯해서 한참을 그곳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부산하던 덤불숲이 오늘은 조용하다. 혹 그 사이 새끼라도 부화시키고 새로운 곳으로 이소라도 했을까?

새소리 대신 습지 근처에서는 마치 고장 난 선풍기 날개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이것이 생명체의 소리인지 다른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궁금한 마음에 돌을 하나 집어 습지 근처로 던져본다. 너무 멀다. 이번에는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힘껏 던져 본다. 역시 멀다. 포기하고 다시 걷는다.

걷다가 만난 근처의 아주 작은 웅덩이에서 조금 전 그 소리와 유사한 소리가 들린다. 소수가 우는 소리는 그것이 산개구리 소리였음을 깨닫게 한다. 늘 산책하는 길에서 초봄 개구리의 소리를 들어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서로를 헐뜯는 소리들. 들리고 보이는 소음들 탓에 귀를 씻고 싶은 심경이었던 대선 정국을 지나 듣는, 기계음으로 착각하리만치 시끄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는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내 편이 되어 달라고. 내가 여기 있다고, 어서 와서 우리 함께 하자고, 나의 짝이 되어 달라고. 누구를 향해 쏘는 독 묻은 화살 같은 소리가 아니라 화합을 부르는 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듣는 심장은 고르게 박동하고 마음은 평안하다.


공원 근처에서 이삼일 전 만해도 보이지 않았던 나무들의 색감이 오늘은 조금 다른 듯 느낀다. 개나리 나무의 꽃눈도 조금 부푼 듯하다. 노란빛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공원에 몇 개 남지 않은 노루귀가 궁금해졌다.

아무런 낌새가 보이지 않는 꽃자리를 새 생명이 나오기는 할 건가 궁금해하며 며칠 동안이나 들여다보았는데 지난밤 내린 단비로 새싹이 나오지는 않았는지...


언제 저렇게 꽃 봉오리를 달았을까?

미세먼지 탓에 하루, 비바람이 치던 날이 또 하루 본 이틀새 어느새 훌쩍 자라 봉오리를 달고 있는 꽃이 너무도 대견하고 어여뻐서 나도 모르게 감탄한다. 얼마나 애쓰며 저 꽃대를 피워 올렸을까? 훌쩍 자라난 예쁜 들꽃을 누군가가 따버릴까 나뭇잎으로 살그머니 꽃 주위를 감싸 둔다.

"내일 또 만나러 오마."


겨우내 온실처럼 만든 간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겨울을 난 금잔화도 풍로초도 꽃들을 피웠다. 꽃대가 올라오고 있는 군자란도 있다. 아침이면 가장 먼저 확인하곤 하는 내가 애써 키운 꽃들과의 만남도 즐겁지만, 들꽃과의 만남은 더 가슴을 뛰게 한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 속 희미한 봄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내어 피어나는 저 연약한 생명의 강인한 힘이 내게 전해지기 때문일까.

화려하지 않아도 자그마해도 그 모습이 너무 의젓하고 고와서 꼬무라고 부르시며 인자한 눈길로 나를 보듬어 주시던 외할머니 같은 눈으로 꽃을 바라본다.

아! 들꽃이 정말 곱다.




어제 내린 비는 단비가 맞다.

달디 단 봄비.

어제만 해도 보이지 않던 회양목도 연둣빛 꽃들이 만발했다.

어디에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것일까.

벌들이 벌써 첫 꿀을 따느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 꽃에도 꽃가루가 있나 보다. 벌이 발에 노란 꽃가루 덩어리를 달고 있다.


회양목 꽃에 벌과 무당벌레가 앉았다. 벌의 발에 노란 꽃가루 덩어리가 보인다.

따스한 양지 녘에서 파아란 미니 꽃밭을 만났다. 봄까치 꽃밭이다.

파아란 꽃들이 땅에 바싹 기댄 채 별처럼 피어 바람에 흔들린다.

어느새 제비꽃도 아주 낮은 자세로 꽃을 피웠다. 한 송이 두 송이.

냉이꽃도, 개불알풀도, 별꽃도 피었다.

김 유정의 소설 속 동백꽃(생강나무)도 피었다.


폰을 들고 나는 엉금엉금 엎드려 꽃들과 얼굴을 마주한다. 소인국의 꽃밭을 내려다보는 거인의 모습으로 나는 꽃의 모습을 담는다.



며칠 동안 필 듯 말 듯 나를 애태웠던 매화꽃 봉오리가 여기저기 팝콘 터지듯이 열리기 시작했다.

봄이 좋아 꽃나무 아래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 할머니들 때문에 꽃을 찍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 생에서 몇 번이나 꽃들을 보실까. 꽃을 바라보며 그 시절을 느끼고 계시는 허리 구부러진 어른들의 정담이 매화나무 아래서 같이 피어난다.

덩달아 나도 행복해진다.

꽃들과 만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볍다.


돌아와 기타를 잡았다.

행복한 사람 (조동진) 해볼까?

아니다, 흥겨운 이문세의 행복한 사람을 고른다. 셔플 리듬이다. 절뚝절뚝 흥겹게 내딛는 듯한 발걸음 같은 리듬이 나의 마음 같다.




오늘도 다시 꽃들을 만나러 간다.

설레는 마음으로.

습지의 개구리들은 짝을 많이 찾았나 보다. 어제보다는 합창 소리가 작다.

그 소리를 녹음해 본다.

개구리 울음소리 (이틀째:소리가 많이 줄었다)


어제는 수줍게 꽃봉오리를 내었던 노루귀가 활짝 피었다.

또 다른 작은 꽃밭이 하루 만에 또 생겨났다.

매일이 새로울 것이다.

봄꽃이 피어나는 새날들이.


어느 날 법정스님께서 일을 보고 해질 녘 돌아오시다가 만난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날 하루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던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하신 글을 읽었다.

능선 위에 펼쳐진 고요하고 평화로운 하늘빛이, 어둠이 내려 산의 윤곽이 내려앉는 시간 보이는 초승달의 모습이, 어린애 눈망울 같은 초저녁별의 모습이... 일생을 통해 몇 번이나 그런 정경을 볼 수 있는지를. 사물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가 우리네 삶을 떠받쳐 주는 주추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스님의 글이 떠올랐다.

내게도 오늘은 그런 날이다.


오랜만에 주어진 느긋한 나이 탓인가.

아니면 느긋한 시간 탓인가

때론 처음 사랑을 느끼던 때의 어린 감성으로, 또는 꼬무 손주를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나이 든 감성으로 그렇게 꽃들을 보고 만났다. 생명력을 더 어여쁘게 볼 수 있게 된 것은 나이가 가져다준 축복이다.




암울했던 긴긴 코로나와 무채색의 겨울을 지나 물오르는 자연의 색의 향연이 이제 펼쳐지리라.

자연이 다시 붓을 들었다.

유난히 설레는 봄날이다


잊고 있던 봄을 다시 만났다.

울던 개구리들의 콘서트는 이틀 만에 막을 내렸다. 그 합창을 들을 수 있던 지난 며칠이 행복했다.


첫사랑을 만난 듯 그렇게 봄꽃을 만났다.



봄까치꽃(큰개불알풀)밭


두 종류의 제비꽃 (땅에 아주 가깝게 피었다)


냉이꽃(좌), 개불알풀(연보라빛)과 별꽃(우:회양목 잎의 크기로 꽃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회양목꽃, 생강나무 수꽃(암수 딴 그루)



노루귀 분홍꽃(꽃이 지고 나는 잎이 노루귀를 닮았다)


Main photo : 흰 노루귀꽃

*모든 사진은 핸드폰으로 촬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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