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고 싶은 우리들의 작은 숲

숲, 스스로 지켜가는 땅

by 샛별




좋아하는 산책길이 있었다.

봄이면 진달래며 산벚나무가 꽃을 피우고 아담한 산소 곁을 돌아 구부러진 나지막한 언덕길에 보랏빛 제비꽃 조개풀 씀바귀꽃이 피어있던 길. 5월이 오면 산소 곁에 늠름하게 서있던 후박 아니 일본목련나무의 향기가 진하게 내려앉던 길. 조금 더 지나면 제법 깊은 숲으로 길은 이어져 우리 동네 백사실계곡이라 이름 붙인 길.

여름이면 녹음이 짙어 그 그늘이 좋았고 가을날이면 그득히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걸었으며 쓸쓸한 겨울에도 나무들이 주는 안온함으로 넉넉함이 느껴지던 한적한 길.

나에게 있어 도시의 외곽에 있어 느끼는 생활의 불편함을 잊을 수 있게 하고 도시생활의 팍팍함을 치유해 준 것은 그 길이 주는 고즈넉한 평화의 힘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된 그 해부터였을 것이다. 숲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숲 근처의 땅에 작은 공원이 하나 만들어지더니 공원과 숲의 경계 지점에서부터 야금야금 인공의 조형물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나무가 한그루 두 그루 베어져 나가고 작은 오솔길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바뀌어 가는 숲을 바라보며 숲으로 가는 발걸음이 점차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무덤 곁을 따라 꼬불꼬불 이어지던 정겹던 좁은 길은 기계를 이용해 파헤치고 다져져 넓은 길이 되어 있었다. 양지 녘에 편안히 자리 잡아 숲에 에워싸여 있던 무덤에는 초록 펜스가 둘러지고 그 아래쪽으로 길을 다시 내느라 높은 둑이 생겨서 그 정겹던 안온함을 잃었다.

예전에 나는 잔디와 작은 풀꽃이 가득한 무덤 곁을 지나며 고개 숙여 풀꽃들을 보았고, 반려견과 또는 친구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길을 따라 산책을 좋아하던 이들이 수런수런 나누는 이야기 소리, 발소리가 오가던 고즈넉한 그 길가에 누워서 무덤의 주인도 따뜻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길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꽤 추운 어느 겨울날 산책길에서 그만 나는 분노하고 말았다.

산소 앞뿐이 아니라 그 앞으로 난 산책길까지 깨끗이 비질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깨끗하게 비질된 절마당에서 느꼈던 상쾌함과는 달리 그 광경은 상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몹시 불쾌하기까지 했다. 오래전 이미 먼발치에서 그 무덤을 치우던 초로의 노인을 본 적이 있던 터라, 마치 참견하지 않아야 할 일에 불쑥 끼어들어 큰 소리로 고집스럽게 당신의 뜻을 주장하는 노인에게서나 받을 황당함이 밀려왔다. 그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어도 어르신이라 차마 대꾸하지 못하는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텅 빈 마음으로 바라보면 평화롭기만 했던 길, 쌓인 나뭇잎들이 조용히 발길에 바스러지며 봄을 기다리던 그 길은 이제 황량한 느낌마저 든다.


그 숲길(왼쪽: 누군가 낙엽을 쓸어 아쉬웠던 날의 한 컷, 오른쪽 : 이어진 길의 자연스러운 모습)



나무에 새들이 깃들고 수풀 속에 동물이 산다면 그들에게 그 숲은 모두가 '함께하는 숲' 일 것이다. 사는 곳을 자기들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 인간뿐이다.

인간의 경제를 중심으로, 인간의 편리를 중심으로, 인간의 먹거리를 중심으로 많은 인간들을 위한 무엇을 위하여 우리들이 행하는 많은 일들... 위안의 작은 숲에서 분노하던 마음은 길을 잃고 마구 헤매었다.

혼자서 중얼중얼 누군지 모르는 이에게 분노의 욕설을 퍼부어 보았지만 시원하기보다는 마음이 쓸쓸하고 슬퍼졌다.

그 마음을 그곳에 두고 떠났다.


돌아서 오는 길, 그 길의 끝자락으로 난 좁은 길에서 진달래나무와 만났다. 마른 가지에는 아직도 떨구지 못한 씨앗들이 매달려 있고 새 봄에 꽃과 잎으로 피어날 움은 추위 속에서도 아주 단단해 보인다. 헐벗은 나뭇가지는 그 조차도 여전히 아름답다.

빈 몸으로 서있어도 늙은 나무여도 어린 나무라도 모든 나무들은 아름답다.

그 속에 새 생명의 봄이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뚝뚝 미련 없이 붉은 꽃송이를 떨구는 동백을 아름답다고 한다. 떨어져서 조차도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라고. 누렇게 잎을 떨구는 목련은 그 모습이 싫어 그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도 있다.

겉모습이 중요한 우리들의 눈으로 바라본 탓이다. 수정이 끝난 뒤 누렇게 변색한 꽃잎들을 미련 없이 떨구고 난 뒤 윤기 흐르는 푸릇한 새잎을 키워내고 천천히 씨앗을 키우는 목련을 오래오래, 길게 바라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꽃잎이 누렇게 될 만큼이나 애쓰고 난 뒤에 이루어지는 일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모든 나무들은 귀하기만 하다.

그 나무들이 자라는 숲은 스스로 자라고 순환하는 체제를 지닌 나무와 풀꽃과 동물들의 마을이다.


늙어서 추해지기 쉬운 것은 인간들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들의 노년이 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얀 은실 같은 머리칼을 날리며 어린 아이나 작은 동물, 꽃이나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흐미하지만 따뜻한 눈동자의 노인은 얼마나 고운가. 주름살 너머로 보이는 세월만큼이나, 작은 것들과 가련한 것들과 낮은 것들을 푸근하게 끌어안는 노인의 모습은 얼마나 포근한가. 죽음은 앞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노교수 모리의 받아들임의 자세는 또 어떤가. 늙고 노쇠한 병석의 자리에서 부끄럽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지라도 흔쾌히 내려놓고 그 상황을 감사하며 받는 노년은 아름답다.

오래 기른 노견조차도 늙어 나를 떠날 때 그는 내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던지 죽음을 앞둔 밤 자꾸만 내 곁을 떠나 있었고 그것이 못내 서운했었다. 그 밤 녀석은 몇 번이고 내게 돌아왔다가는 다시 혼자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듯싶었다.


나무의 목질부는 죽은 조직이다. 죽어서도 나무를 지탱해주는 것은 그 조직이다. 나무를 키우는 부분은 껍질 아래쪽의 형성층으로 매년 새롭고 젊은 체관부와 물관(나중에 죽어 목질부를 이루게 될)을 만들어 낸다.

소로의 글 속에서 나는 숲의 나무속에서 찾을 수 있을 바람직한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더 이상 어떤 수액도 흐르지 않는 그들의 보수적인 심재는 그들의 성장을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장을 지탱하는 기준이다. 성장하는 줄기가 더 이상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그것은 완전히 썩어 사라진다. 그들의 보수주의는 죽어 딱딱해진 심재로 느릅나무의 모든 성장을 지지하는 주축이 된다. 그것은 그 자체보다 그들의 급진주의가 영토를 확장하도록 돕는 지주라는 것에 의해 평가받는다. 고갱이에서 죽은 지 반세기가 지난 후에 그것들은 급진적인 개혁에 의해 보존된다. 그것들은 사람들처럼 급진주의자에서 보수주의자로 변하지 않는다. 그것들의 보수적인 부분이 먼저 죽어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들의 급진적인 부분과 성장하는 부분은 살아남는다.
- '소로우의 일기'중에서 , 헨리 데이비드 소로





도시의 외곽에도 아파트의 물결이 밀고 들어온다. 시야를 점점 가리며 올라가는 고층의 아파트가 바라 볼 하늘의 크기를 점점 줄여간다. 새로운 집들이 들어서면서 생기는 생활의 편리함 만큼이나 빨리 숲은 우리에게서 사라져 가는 듯하다.

도시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아주 소소하지만 삶에 넉넉함과 사색의 시간을 내어주는 그 숲들이, 아주 작은 숲일지라도 소중히 지켜지기를 바란다.


숲은 우리에게 그런 곳이다.

사색의 시간, 편안하게 생물들과 함께 생명이 가지는 경이로움과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 그곳에 있다.

이제 인간의 눈으로 만들어 나가는 숲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 저절로 자라고 지켜지는 숲으로 우리 곁의 숲들이 오래오래 남아 있기를...


나는 오늘도 소망한다.



Main photo : by Vjekoslav Domanovi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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