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 찬바람 부는 변덕스러운 날씨 속 베란다에서 키우는 군자란 꽃대가 자라 꽃을 피우기까지 며칠을 들여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어느 날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말없이 아들 녀석의 등을 다독이며 두드려 주던 오래전 그 시간이.
자신의 방에서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어둠 속에서 숨죽이며 울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 그냥 돌아서려다 말고 들어가 가만히 녀석의 등을 토닥였다. 아들은 나를 내치지 않고 기대어 흐느껴 울었다.
그래 시간이 지나면 잊힌단다. 잊히더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토닥이며 전하고 싶은 말은 그랬다. 나의 사랑이 그랬듯이, 젊은 시간의 나와 그 시간의 아픔도그랬듯이.
놀랍게도 사랑 때문에 우는 아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젊은 시간의 나보다 더 아팠다. 불쑥 기억 속 잊혀 단단히 아물어 굳어버린 줄 알았던 젊은 날이 잠시 기억났다. 그 사랑의 기억도 이제와 다시 보면 풋풋한 기억, 나는 그 여문 자리에 앉은 딱지를 녀석의 등을 두드리며 함께 어루만졌다.
군자란을 들이고 처음 꽃을 만났던 날이 생각난다. 처음으로 피워낸 꽃은 참으로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군자란은 새 식물체를 곁에 내었고 그 분주는 몇 번이나 다른 화분으로 옮겨 심어졌다. 30여 년이 되어도 꽃을 잘 피운다는 군자란. 그들은 모두 자라나 꽃을 피웠지만 처음 내게 황홀한 순간을 경험시켜 준오래된 어미 군자란은 여느 화분과는 다른 존재다. 새분에 분갈이를 해주며 정을 주어 매년 꽃은 피우지만 첫 꽃만큼은 못한 성근 꽃들을 피워낸다. 봄이 오면 싱싱한 녹색의 잎 속에서 꽃대가 자라서 꽃이 피어나는 날을 설레며 기다리다 보면 나는 늘 처음 만났던 꽃의 시간을 그리워하게 된다.
꽃을 기다리며 사랑을 돌아보게 되었다.
너와 나, 우리들의 사랑의 시간을.
운명이 아니었던지 내게 왔다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떠나간 사랑은 나의 서툴음과 조급함 탓은 아니었을까. 천천히 잘 가꾸었다면 꽃처럼 아름다운 시간을 살 수 있었을까.
그러나 소중한 기억은 반듯하게 이루어진 삶의 순간만은 또 아니어서 돌아보면 그 시간도 또한 아름다운 것을.
많은 부부들이 흐르는 세월 속 성글어진 꽃대처럼그렇게 평생을 함께 살아간다. 나 역시 일반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삶을 산다.
함께 하는, 일상처럼 편안한 삶이, 눈부시지 않아도 편안해서 좋지만 때로 주변 수많은 커플들 중에 첫사랑 같은 풍성함으로 사는 화사한 꽃 같은 부부를 만날 때가 있다. 그 모습은 처음 만났던 그 꽃처럼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들이 이루어낸 사랑의 시간들을 그려보며 나는 작은 소망을 키운다.
나의 자식들이 눈부신 꽃 같은 인연을 만나기를... 헤어진 아픔이 거름이 되어 진정 소중한 인연을 만나 풍성한 꽃을 피워낼 그런 이를 만날 수 있기를...
다시 오지 않을 내 젊음의 시간.
서툴었던 나와는 다른 꽃의 시간.
느리게 느리게 피워 올리고 있는 꽃을 기다리며 젊은 너를 향한 소망이 내 마음에 꽃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