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돌보며 익어가는 시간
가을빛이 곱게 물든 들길을 따라 영동군 심천면의 작은 마을로 향했다. 구순을 앞둔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방문간호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하늘은 유난히 높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논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길가의 코스모스는 마지막 빛을 머금은 듯 흔들리고 있었다.
마을엔 슬픈 소식이 있었다. 동네 친척 어르신 한 분이 간암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상가 근처를 지나며 어르신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살아 있을 때 잘해야지. 죽어서 제사 지내면 뭐하나.”
그 말이 바람결에 실려 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한가를, 새삼 느꼈다.
할머니는 김장철이 다가온다며 생강을 다듬고 계셨다. 굽은등을 하시고 마른 손끝으로 껍질을 벗기시던 모습이 정겹고도 단단해 보였다. 나도 곁에서 잠시 거들었다. 그러자 이웃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함께 손을 움직이고, 담소를 나누었다. 마당에는 웃음소리가 퍼지고, 햇살은 그 웃음에 닿아 더욱 따뜻해졌다.
시골의 풍경은 늘 그렇듯 포근했다. 서로의 일을 내 일처럼 도우며, 함께 흙냄새를 맡고, 함께 하루를 살아간다. 도시의 시간보다 느리지만, 그 느림 속에는 사람 냄새와 삶의 온기가 가득하다.
가을은 참 좋은 계절이다. 단풍이 알록달록 물들고 , 하늘은 투명하게 맑다. 그러나 어르신들 말씀처럼, 이 계절은 가장 바쁜 때이기도 하다. 수확의 계절, 손끝마다 일의 무게가 묻어나는 시간.
그동안 나는 가을을 그저 놀기 좋은 계절로만 여겨왔다. 하지만 오늘은 내게 다른 가을을 보여주었다.
익어가는 곡식처럼, 사람의 마음도 가을처럼
익어가는듯 하다.
오늘의 가을은 누군가의 손끝에서, 웃음 속에서,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정 속에서 천천히 익어가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삶이란 결국 서로를 돌보며 익어가는 시간’임을 배웠다.
따뜻하고 다정한 하루였다.